...이 상황을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일단 제 이름은 볼프강 슈나이더, 토끼 같은 아내와 여우 같은 딸과 오순도순 살고 있는 평범한 독일인 가장이었습니다. 아, 원래 여우 같은 아내와 토끼 같은 딸 아니냐고요? 아니에요. 우리 집은 저게 원래부터 맞는 표현이에요. 아무튼 간에. 볼프강 슈나이더, 인생 일대에 아주 큰 고난에 직면하였습니다. “자요, 미스터 슈나이더 씨.” “...” 제 앞에 이름 모를 칵테일 잔 하나를 들이미는 아내와 똑같이 생긴 여자. 네, 저는 딸과 집으로 돌아가던 중, 아내의 쌍둥이 여동생에게 납치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 * * “엄마, 엄마!” 비안카의 목소리에 파이는 순간 눈을 떴다. 나른한 오후 시간이어서 그랬나. 깜빡 잠이 들었던 것 같다. 비안카의..
이른 아침, 볼프강은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그런 볼프강의 앞에는 소마가 만들어준 헐거운 인형을 가지고 노니는 비안카가 있었다. 그리고 그런 비안카의 머리카락은 많이 헝클어져 있는 상태였다. 마치 몇 번이나 묶고 풀음을 단시간동안 반복해왔던 것처럼. “흐음...” 아비가 자신의 머리를 계속 어루만지고, 그에 비해 예쁜 결과물이 나오지 않는 것에 대해 비안카 또래의 아이라면 진즉 부모에게 투덜거렸을 터지만, 비안카는 꽤나 참을성 있게 기다리고 있었다. 비안카는 자기 자신이 무척이나 귀엽고 사랑스럽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자신의 사랑스러움을 완성시키는 요소 중 하나가 헤어스타일이라는 것도 무척이나 잘 알고 있었다. 오늘 아침은 비안카에게 있어서 특별한 날이 시작되는 날이었다. 일주일..
-슈나이더 씨. 누군가가 볼프강을 불렀다. 유니온과 관련된 사람은 아닌 듯 했다. 유니온과 관련이 있는 사람이면 저런 칭호보다는 ‘볼프강 슈나이더 요원’ 이라고 불렀을 테니까. 그렇다면 자신을 알고 있는 어느 일반인? 잠깐 생각을 하던 찰나에 그 목소리가 또 한 번 볼프강을 불러 재꼈다. -미스퉈 슈, 나이더er~ 전에 불렀던 것과 달리 조금 장난스럽게, 혀를 꼰 발음이었다. 앞선 말도 솔직히 따지고 보면 ‘Mr.슈나이더’ 지만 그건 그래도 격식을 차린 말투기라도 했지. 그리고 저 잔뜩 꼬아서, 그래서 분명 상대방이 자신을 비꼬고 있는 것이 분명히 느껴지게 하는 저 말투를 가진 이를 볼프강은 소름 돋지만 알고 있었다. 볼프강은 자신의 간담이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아는 척 하면 골치가 아플 상대방 상위권..
한편, 파이에게 한 시간정도 성 주변을 산책하고 온다던 볼프강은... “이게 말이 되냐고!” ...그만 길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일단 자리를 비켜줘야 할 거 같았기에, 1시간 정도 주변을 둘러보고 오면 되겠거니 생각했는데, 이상하게도 오늘따라 볼프강을 발걸음을 딛는 데마다 막다른 길이었고, 그렇게 누군가가 의도한 것처럼 숲을 돌고 돌다 종국에는 길을 잃어버리는 데에 그친 것이었다. 볼프강은 들을 이가 아무도 없을 터인데도 소리를 질렀다. “아니, 아무리 만화라도 이렇게 작위적인 설정은 안 한다고! 자주 드나들던 숲 속에서 길을 잃어버리는 게 말이 돼!?” 도대체 누군가에게 하는 불평인지는 모르겠다만, 볼프강이 항상 다니던 숲 속에서 길을 잃어버리는 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지금 그걸 가장 잘..
마카롱을 우물거리는 비안카의 왼쪽에는 루나가, 오른쪽에는 소마가 각각 서 있으면서 아주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정확히는 자신들의 방향에 있는 비안카의 머리카락을 한 움큼 붙잡으면서. 루나가 됐다, 라는 말과 함께 고개를 뿌듯하게 끄덕였다. “역시, 잘 어울릴 줄 알았어!” 루나가 잘 어울린다고 하는 건 비안카의 왼쪽 트윈 테일을 묶고 있는 옅은 벚꽃색 리본에게 한 말이었다. 그에 반해 오른쪽에서 소마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루나 것도 잘 어울리지만, 내 것도 괜찮지 않아?” 소마가 말하는 것도 루나와 같은 리본을 뜻하는 바였지만, 소마의 리본은 좀 더 진한 짙은 분홍색의 리본이었다. 위쪽에 가지런히 묶여있는 루나 쪽 리본과는 달리, 소마 쪽 리본은 그보다는 살짝 아래에 묶여있었다. 만약 볼프강이 ..
비안카의 방에서 나온 볼프강을 향해 읽고 있던 책에서 시선을 볼프강에게로 돌린 파이가 물었다. “비안카는요?” “이제 막 잠들었어. 엄마랑 더 놀고 싶다는 거 간신히 동화책 5권 읽어주는 거로 무마했어.” 어쩐지 목소리 끝이 약간 갈라진 게 느껴지는 볼프강의 한숨 어린 푸념에 파이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읽고 있었던 책 - 『아주 쉽다! 독일어 기초 문법』 이라는 책이다 –을 소파 바로 앞에 있는 탁상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볼프강은 아주 자연스럽게 파이의 옆에 안착했다. 이제 부부만의 소중한 대화 시간인 것이다. 볼프강은 파이가 방금 전까지 진지한 얼굴로 읽고 있던 책의 정체를 알자마자 눈살을 저절로 찌푸렸다. “너무 열심히 공부하는 거 아니야? 간단한 독어 회화 정도는 되잖아?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어느 유서 깊은 도시에는 르네상스 시대쯤에 만들어진 오래된 분수대가 하나가 있다고 했다. 관광객들은 그 분수대의 고풍스러움과 오랜 세월을 견딘 인내력에 감탄을 자아내지 못한다고 한다. 허나 이 분수대가 유명해진 것은 앞선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바로, 일명 ‘천생연분을 만나게 해주는 분수대’ 라는 것이었다. 그 분수대의 효험에 대한 증언은 인터넷에 카더라 소식으로 들려온 게시물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이 분수대의 영험함을 무언가에 단단히 꽂혀버린 독실한 신자같이, 그렇기에 한없이 진지한 말투로 주장을 하였다. 이에 이 분수대는 그 유명세에 힘입어 수많은 젊은 남녀들의 필수 배낭여행 코스로 자리 잡게 된 것이었다. 물론 볼프강은 그런 거 믿지 않았다. 그냥 우연의 일치로 일어나게 된 것..
웬 아기 천사가 떨어졌다고 할 정도로 아이는 갑작스럽게 나타났다. 예닐곱 정도 되었을까? 어린 아이치고 이목구비가 제법 짙고 뚜렷하다. 갈색이 섞인 듯한 짙은 금발에, 독일인 중에서도 보기 드문 짙은 푸른색 – 언뜻 보면 보라색으로 보이는 - 의 벽안을 깜박이며 아이는 어느 한 곳에 시선을 내리꽂고 있었다. 바로 청년이 팔고 있는 아이스크림에 온 정신을 빼앗긴 것이었다. 아이의 심각한 표정에서 아이스크림을 파는 청년은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어린 아이들은 참으로 귀엽다. 게다가 청년은 아이들을 대체적으로 귀여워하는 편이었고, 이곳에서 2년 간 장사를 하며 많은 어린이 손님들을 상대해왔으나 이렇게 깜찍하게 귀여운 꼬마 손님은 또 처음이었다. 아이가 고개를 살짝 갸웃거릴 때마다 조각상이 움직이는 듯, 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