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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 아기 천사가 떨어졌다고 할 정도로 아이는 갑작스럽게 나타났다. 예닐곱 정도 되었을까? 어린 아이치고 이목구비가 제법 짙고 뚜렷하다. 갈색이 섞인 듯한 짙은 금발에, 독일인 중에서도 보기 드문 짙은 푸른색 – 언뜻 보면 보라색으로 보이는 - 의 벽안을 깜박이며 아이는 어느 한 곳에 시선을 내리꽂고 있었다. 바로 청년이 팔고 있는 아이스크림에 온 정신을 빼앗긴 것이었다. 아이의 심각한 표정에서 아이스크림을 파는 청년은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어린 아이들은 참으로 귀엽다. 게다가 청년은 아이들을 대체적으로 귀여워하는 편이었고, 이곳에서 2년 간 장사를 하며 많은 어린이 손님들을 상대해왔으나 이렇게 깜찍하게 귀여운 꼬마 손님은 또 처음이었다. 아이가 고개를 살짝 갸웃거릴 때마다 조각상이 움직이는 듯, 묘한 비현실성도 보여주었다. 청년은 생각했다. 이렇게 예쁘고 사랑스러운 아이의 부모는, 참 행복할 것이라고. 그리고 얼굴 또한 궁금해졌다. 이런 아이의 부모라면, 얼마나 미인(美人)일까?
청년의 소망은 곧 이루어졌다. 멀찍이서 한 남자가 아이를 향해 걸어오는 것을 금방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 남자의 이목구비는 아이보다 훨씬 날카롭고 성숙하긴 하나 아이와 많이 닮아있었다. 그냥 딱 봐도 아이와 가족 관계라는 걸 바로 알 수 있을 정도로. 심지어 남자는 아이를 이렇게 불렀다.
“딸, 거기서 뭐해?”
어디로 보나 사이좋은 부녀(父女) 지간의 모습이었다. 청년은 저절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어린 딸과 노니는 젊은 아버지의 모습이 참으로 보기 좋은 탓이었다. 물론, 이 환상은 단 몇 초 만에 깨져버리고 말았다. 그 이유는 이 부녀의 대화 때문에.
아이는 아이스크림이 인쇄된 사진을 가리키며 자기 아버지를 향해 강력한 의사를 표했다.
“아빠, 나 이거 사줘.”
아이는 안 그래도 동그란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한껏 애교를 부렸다. 아이는 아이스크림을 너무 먹고 싶어 했다. 청년은 이 마음을 사르르 녹이는 애교에 남자가 포기할 것이라고 장담했다. 장사꾼의 입장을 빼고 봐도 아이는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만약 청년에게 아이가 그런 부탁을 했으면 아이스크림을 100개는 더 사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청년과 달리 남자는 냉정했다.
“안 돼.”
“왜?”
아이는 당연히 이 부당함을 호소했다. 그러자 남자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너, 얼마 전에 충치 치료한 거 기억 안 나? 그래서 엄마하고 약속했잖아. 단 거 많이 안 먹을게요, 라고.”
“하지만 지금 엄마는 없잖아...”
“엄마 몰래 먹을 생각을 해? 야, 참 내 딸이긴 하지만 정말 영악하네.”
“...”
저게 욕이야, 칭찬이야...방금 전까지 훈훈한 부녀 지간이었다고 한 걸 청년은 즉시 취소했다. 아이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자 아주 적당한 타협점을 찾았다는 듯, 남자에게 말했다.
“괜찮아. 아빠랑 같이 먹었다고 하면 돼.”
“뭐?! 이제는 아빠를 공범으로 만들 생각이야? 와, 정말...누구 딸인지 참...”
“아빠 딸이지. 아빠가 방금 아빠 입으로 아빠 딸이라며.”
“...”
남자, 아니 볼프강 슈나이더는 골치가 아파왔다. 자기 딸은 정말 사랑스럽고, 예쁘고, 귀엽다. 이건 인정한다. 하지만 방금 언급한 세 가지를 잘 써먹을 줄도 아는 잔머리 또한 비상했다. 이 부분은 도대체 누굴 닮은 거야...아무래도 자신을 닮은 거 같았다. 범인은 아주 가까이 있었다.
볼프강은 결국 자신의 패배를 인정했다. 하지만 깨끗이 인정하지는 않았다.
“딸, 그리고 우리 지금 점심 먹으러 가는 길이었던 거 기억하지? 아이스크림 먹고 점심 먹을 수 있겠어?”
“응! 나, 엄청 잘 먹잖아!”
“...그래, 그럼. 대신 이따 밥 먹고 간식은 없는 줄 알아. 알았지? 오후 간식 지금 먹는 거라고 생각해라?”
“응!”
아이는 고개를 힘차게 끄덕인다.
겨우 딸아이와 타협점을 찾았다. 볼프강은 오늘 돌아오는 아내의 잔소리를 들을 생각에 벌써부터 오금이 서렸다. 하지만 이 영악하고 사랑스러운 딸에게 약한 건 아내 또한 마찬가지이니 이해해주리라고 믿는다. 볼프강은 아까부터 자신과 자신의 딸을 흐뭇하게 쳐다보고 있던 점원에게 주문을 했다.
“딸기 맛으로 하나요.”
딸아이...그러니까 비안카 슈나이더(Bianka Schneider)는 딸기 아이스크림을 제일 좋아했다. 딸의 식성을 제대로 알고 있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비안카는 자기 아버지 – 아이스크림이 나오는 동안 점원이 딸이 참 예쁘다는 말로 시작하는 대화가 끝날 때까지 - 가 자신에게 줄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끈기 있게 기다렸다.
* * *
오른손에는 쟁취한 아이스크림을, 왼손에는 볼프강의 손을 잡은 채로 비안카는 광장을 거닐었다. 인공적으로 만든 딸기 맛은 언제 먹어도 맛있었다. 심지어 딸기 알갱이로 추측되는 것들도 아이스크림에 군데군데 붙어있었다. 아이스크림을 맛있게 다 먹고 나니 그제야 엄마한테 혼이 날 아빠 – 물론 비안카도 같이 혼나겠지만 – 에게 미안한 감정은 들었는지 비안카가 볼프강에게 말을 걸었다.
“아빠.”
“응?”
“아빠는 정말 좋은 아빠야!”
“하하...이미 알고 있는 걸 굳이 그렇게 말할 필요 없단다, 딸.”
말은 저렇게 하면서도 딸에게 칭찬 받은 것이 못내 좋은지 귓불이 약간 빨개졌다. 볼프강 슈나이더는 자신의 딸 비안카 슈나이더를 무척이나 사랑했다. 물론 아버지로서 드는 당연한 감정이겠지만, 그래도 볼프강은 이 감정에 나름 충실히 살고자 노력했다. 그래서 그 바쁜 클로저 일을 하면서 딸하고 같이 있으려고 노력을 많이 했으며, 같은 업종인 아내가 바쁠 때에는 딸의 육아를 해주는 등의, 참 착실한 남편이자 아버지였다.
비안카도 볼프강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다만 엄마인 파이를 훨씬 더 좋아할 뿐. 그래도 아빠는 2순위로 해줄게! 라며 비안카는 그 특유의 엉뚱한 말로 볼프강을 미소 짓게 했다. 이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는 딸이 도대체 어떻게 내려왔을까?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볼프강은 비안카를 데리고 단골 식당으로 데리고 갔다. 여기서 나오는 프랑크 소시지는 어린아이가 먹기에는 제법 컸는데도 불구하고, 비안카는 깨끗하게 접시를 비웠다. 아까 아이스크림을 사주면서 볼프강과 한 약속을 지키려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비안카는 식성이 그렇게 까다로운 편이 아니었다. 독일인인 아버지와 혼혈 중국인 어머니의 교차 육아를 받고 자라면서 다양한 음식을 먹었기에 그렇게 된 거라고 볼프강은 추측했다. 식사가 끝나자 부녀는 그 자리 그대로 티타임을 가졌다. 볼프강은 커피를, 비안카는 따뜻하게 데운 우유였다. 호호 불며 우유를 조심스럽게 마시는 태도에서 볼프강은 이상하게 아내의 모습을 찾아내었다.
아, 벌써부터 보고 싶잖아, 파이 윈체스터...
안 본지 일주일은 되었나? 그건 볼프강뿐만 아니라 비안카도 그러했다. 두 부녀의 사랑을 듬뿍 받는 파이 윈체스터는 아마 이 세상에서 가장 복 받은 사람일거라고 볼프강은 생각했다.
“아빠.”
“응?”
“엄마 오늘 저녁에 오는 거 맞지? 그치?”
“응...”
비안카도 연신 기쁜 눈치인지 아침부터 저 질문을 몇 번이나 물어보았다. 딸의 이런 질문에 답하는 것이 귀찮지는 않았다. 볼프강은 비안카 앞에서는 무서울 정도로 성실한 사람이 되었다. 물론 본래의 모습에서 약간 성실해지는 것뿐이니, 파이는 다 소용없다고 투덜거렸지만.
“딸도 엄마 못 봐서 상사병 걸리려고 하는 거 같은데, 그건 이 아빠도 마찬가지야.”
“엄마는 항상 바쁜 거 같아...”
아이러니하게도 비안카가 태어나기 전과 직후에는 볼프강이 훨씬 바빴다. 비안카가 제대로 기억을 하고 사고하게 될 쯤부터는 파이가 바빠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비안카에게 있어서 가장 시간을 덜 보낸 쪽은 파이일터인데, 비안카는 엄마를 훨씬 좋아했다. 아빠를 안 좋아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싫어하는 아빠와 이렇게 단 둘이 시간을 보내면서 조잘조잘 시끄럽게 대화하는 거 자체가 있을 수 있는 일일까? 전혀 아니었다.
“엄마 오면 루나 이모한테서 배운 종이접기 보여줄 거야!”
“그래? 말썽쟁이 1호...아니, 루나 이모한테 뭘 배웠는데?”
“비밀! 엄마 오면 아빠한테도 같이 보여줄게!”
평소의 호칭대로 부르려다가 볼프강은 급하게 정정했다. 아이 앞에서는 말을 가려야할 거 같다는 파이의 말이 떠오른 탓이었다. 물론 이 부분은 대체적으로 지켜지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아마 가장 많이 지켜지지 않는 부분은 볼프강과 파이의 대화 부분일터였지만.
볼프강은 비안카를 유심히 보았다. 확실히 자신을 쏙 빼닮기는 했다. 이런 미남 아버지를 닮은 딸이니 얼마나 이쁠까...유일하게 자신과 다른 부분은 동그란 눈매와 짙은 벽안뿐이었다. 위상력에 각성하기 전의 자신의 눈동자도 벽안이었으나 저렇게 예쁜 색의 벽안은 아니었다. 파이를 닮은 것이 분명하였다. 그래도 가끔씩 눈매를 날카롭게 추켜올리면 볼프강의 얼굴이 보이기는 했다. 볼프강은 문득 시계를 보았다. 오후 시간이 생각보다 많이 지나간 상태였다. 볼프강은 빈 우유 컵을 이리저리 굴리고 노는 비안카를 향해 말했다.
“딸, 슬슬 가볼까? 엄마 올 시간 다 되어가네.”
“응!”
비안카는 당차게도 앉아있던 의자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그리고 야무지게 옷에 묻어있는 먼지 또한 탈탈 털었다. 그리고 볼프강의 항상 잡는 손을 잡아 – 이제는 볼프강 또한 익숙해 왼손은 항상 길게 내리고 있다 – 식당 문을 나섰다. 비안카는 곧 만날 엄마 생각에 간식 가게를 용감히도 지나쳤다.(아까 볼프강과 한 약속도 있었지만) 시내 광장과 집은 생각보다 떨어져 있지 않았다. 든든한 뱃속을 소화 시킬 산책이 충분한 정도.
그렇게 20분 정도 걸어 집에 도착하자, 볼프강은 집 대문 앞에 택시 한 대가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처음에는 좀 갸우뚱했지만 곧 답은 찾아냈다. 이 시간에 택시 – 안 그래도 탈 것에는 무척 약한 –를 타고 부리나케 슈나이더 가(家)에 올 사람은 딱 한 명뿐이었다. 비안카도 알아차렸는지 곧장 볼프강이 생각한 답을 내뱉었다.
“엄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택시의 뒤쪽으로는 무거워 보이는 캐비닛을 꺼내고 있는 파이가 보였다. 파이는 제 아이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그쪽으로 고개를 돌려, 느긋하게 오후 산책을 즐기고 있던 자신의 가족을 발견했다. 저절로 피어나는 미소는 덤이었다.
“선배! 비안카!”
“엄마--!!”
비안카는 이미 볼프강의 손을 놓고, 파이에게 전력질주로 달려가는 중이었다. 그런 비안카를 향해 파이는 몸을 낮추었다. 그 덕택에 비안카는 파이의 품속에 어렵지 않게 안길 수 있었다. 오랜만에 맡는 엄마의 냄새에서는 살짝 이국적인 냄새도 같이 있는 듯 했다. 볼프강은 비안카보다는 느긋하게, 파이에게 다가왔다.
“왔어?”
“네...공항에 일찍 도착해서 택시 잡고서 왔어요.”
“연락하지...그러면 공항으로 마중 나갔을 텐데.”
“괜히 신경 쓰이게 하고 싶지 않았거든요. 무엇보다도 이렇게 돌아오면 놀라는 선배의 얼굴을 보는 것도 재밌습니다.”
담백하게 애정 공세를 하는 파이 덕에 볼프강은 잠시 고개를 숙였다. 혹여 붉어진 얼굴을 들키지 않을까 염려한 탓이었다. 볼프강은 이 쨍한 기분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부러 말을 많이 걸었다.
“이번에는 며칠 쉰다고 했더라?”
“열흘 정도입니다. 오랜만에 셋이서 같이 보내는 시간이네요.”
“그럼 잘 되었네. 느긋하게, 이야기도 좀 많이 나누자고.”
“네, 그럽시다.”
파이는 비안카를 안은 채로 집으로 들어갔다. 볼프강은 어차피 자신의 손에 짐이 없었던 터라 파이의 커다란 여행용 가방을 들고 뒤따라 들어갔다. 볼프강이 앞에 가는 파이에게 거의 소리치듯이 전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 당신이 오면 비안카가 루나 이모한테서 배운 종이접기를 보여준다고 얼마나 자랑했는지 몰라.”
“그래요? 비안카, 엄마를 위해 열심히 연습했나요?”
“네! 엄마한테 선물해줄려고요! 물론 하는 김에 아빠한테도!”
“‘하는 김에’ 라는 말을 뺐으면 아빠가 더 좋아하셨을 거 같은데 말이지요.”
파이는 볼프강 쪽을 힐끗 보았다. 볼프강은 어깨를 으쓱했다. 비안카에게는 아무리 해도 파이를 이길 수 없으니까. 파이는 비안카를 내려놓고 기지캐를 크게 폈다. 몸이 피로한 상태에서, 어느 정도 큰 어린 아이를 계속 안고 있는 건 허리에 조금 부담이 되는 일이었으니까.
“그럼 오랜만에 셋이서 먹는 저녁이네요. 오늘은 제가 준비할게요.”
“아니야. 당신은 가서 쉬어. 피곤할 텐데.”
“그럼 둘이 같이 만들까요?”
“비안카도 같이!”
볼프강과 파이의 행복한 분위기에 더불어 비안카가 손을 반짝 들었다. 귀여운 딸이 작은 손으로라도 보탬이 되고 싶은 걸 흐뭇하게 쳐다보는 부부였다. 파이가 웃었다.
“그래요. 그럼 셋이서 같이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