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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 볼프강은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그런 볼프강의 앞에는 소마가 만들어준 헐거운 인형을 가지고 노니는 비안카가 있었다. 그리고 그런 비안카의 머리카락은 많이 헝클어져 있는 상태였다. 마치 몇 번이나 묶고 풀음을 단시간동안 반복해왔던 것처럼.
“흐음...”
아비가 자신의 머리를 계속 어루만지고, 그에 비해 예쁜 결과물이 나오지 않는 것에 대해 비안카 또래의 아이라면 진즉 부모에게 투덜거렸을 터지만, 비안카는 꽤나 참을성 있게 기다리고 있었다. 비안카는 자기 자신이 무척이나 귀엽고 사랑스럽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자신의 사랑스러움을 완성시키는 요소 중 하나가 헤어스타일이라는 것도 무척이나 잘 알고 있었다.
오늘 아침은 비안카에게 있어서 특별한 날이 시작되는 날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 어린이 수영 교실에 나가는 날이기 때문. 다양한 어린아이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에서도 비안카는 아주 특출나게 눈에 띄는 편이었다. 비안카의 특출난 외모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 미모를 아주 고스란히 물려준 아버지의 존재 때문이기도 했다.
결국 오늘 아침의 볼프강의 선택은 심플한 포니테일이었다. 마침 볼프강도 비슷한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어서, 안 그래도 닮은 부녀(父女)를 더 붕어빵 같이 만들게 했다. 마무리는 비안카가 잘 하고 다니는 붉은색 리본. 거울을 유심히 보는 비안카는 엄지를 척 들었다. 그리고 볼프강은 그런 딸의 행동을 똑같이 따라했다. 손님이 만족하는 모습에 기뻐서 저절로 나오는 행동이었다. 그리고 이 모습을 조금 멀찍이서 보던 슈에는 파이에게 중얼거렸다.
“의외로 아이 돌보는 건 능숙한 거 같네.”
“내가 좀 많이 바빠서. 비안카의 교육은 죄다 선배가 도맡아서 했어.”
“흐음...그리고 그건 현재진행 중?”
“으응, 뭐...그렇지.”
파이는 그 부분에서는 살짝 난감한지 얼버무렸다. 볼프강은 별로 신경 쓰지 말라고 했지만, 파이에게는 영 미안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었다.
나갈 채비를 하는 볼프강과 비안카. 비안카의 옷매무새를 꼼꼼히 챙겨주는 볼프강의 모습을 슈에는 한참동안이나 그렇게 좋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영~ 좋지 않은 시선으로 주려고 해도 볼프강의 지금까지의 행동에서 크게 감점 요소는 없었다. 얼마나 꼼꼼하고 완벽한 건가, 이 남자는! 준비를 다 마친 볼프강은 딸아이에게 말했다.
“자, 인사해야지.”
“응! 엄마, 이모, 수영 잘 다녀오겠습니다!”
허리를 꾸벅 숙이는 비안카와 달리 볼프강은 가벼운 손인사가 전부였다.
“그럼 다녀올게.”
“잘 다녀오세요.”
“...”
현관 쪽에서 잠깐 조잘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뚝 끊겨졌다. 볼프강과 비안카가 집을 나선 모양이다. 파이는 잠깐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뒤쪽 창문으로 향했다. 남편과 딸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더 보고 싶은지 엄청 서두르는 눈치가 다분히 보였다. 한참 동안이나 창문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파이를 향해, 슈에는 속이 훤히 보이는 꼼수를 내비쳤다.
“언니, 오랜만에 나랑 외출할래?”
* * *
볼프강과 비안카가 같이 다니면 항상 주변의 이목을 받는다. 누가 보든 아빠와 딸로 보이는 사이. 게다가 멀리서 희끄무레한 시선으로 봐도 대단히 범상치 않은 외모를 가진 사람임이 확연히 보이는 이목구비. 그 잘난 얼굴에다가 선글라스를 끼고 다니니 당연히 눈에 안 뛸래야 안 뛸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저 선글라스도 볼프강만 하고 다녔는데, 아빠만 멋진 거 반대! 라면서 비안카도 강력히 원해서 이렇게 둘이 선글라스를 낀 채로 바깥을 돌아다니는 것이 이제는 일상이 되었다.
비안카가 일주일에 한 번 만나는 수영 교실에 다니는 이유는 일단 엄마인 파이한테 있었다. 볼프강은 수영은 언젠가는 자연스럽게 배우는 것이라며 굳이 돈을 내주며 배우는 것에 좀 회의적이었지만 파이는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볼프강에게 1시간 넘게 비안카에게 수영을 전문적으로 배우게 해야 한다고 설교를 토로한 적이 있었다. 결국 아내를 못 이기는 볼프강은 그걸 수락했다. 그리고 그 직후 볼프강은 깨달았다. 파이는 지금까지도 수영에는 영 젬병인 맥주병이라는 사실을.
슈나이더 가(家)가 바닷가에 휴가로 놀러간다고 해도 파이는 항상 해변에서 자리를 지켰다. 그 이유는 수영에는 영 서투르기에. 그리고 파이는 왠지 모르지만 비안카에게만큼은 자신의 서투른 부분을 적극적으로 보여주기 싫어하는 거 같았다. 이에 대해서 볼프강은 자신이 아직은 한수 위라고 생각한다. 그야 파이보다는 비안카와 같이 있는 시간이 더 많다보니 숨기고 싶어도 숨기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수영 교실이 열리는 센터까지 집에서 거리가 그렇게 멀지 않기에, 볼프강은 주로 걸어서 비안카를 배웅해주곤 했다. 그렇다보니 가는 길에 비안카와 대화를 나누는 건 필연적이었다.
“아빠.”
“응?”
“나 이제는 개헤엄 칠 수 있다!?”
“그거 엄마가 들으면 왠지 슬퍼할 거 같다...”
엉뚱한 비안카가 항상 들고 오는 대화는 그야말로 통통 뛰어다니는 탱탱볼이었다. 예를 들자면, 오늘 먹을 간식의 메뉴를 정하는 진지한 대화를 하다가도 갑자기 카나리아는 어떤 색이 가장 이쁘냐는 둥, 그러다가 다시 간식을 정하려고 하는 기세처럼 보이다가도, 꽃다발을 만들어서 엄마한테 주면 기뻐하겠지? 라는 식의 대화로...계속 경험해도 가늠조차 알 수 없는 래퍼토리였다.
전문적인 수영 기술을 알려주는 수영 교실에서 개헤엄(?) 같은 건 정식으로 알려주지 않는다. 다만 쉬는 시간에 아이들과 놀면서 저절로 습득하는 것만은 사실이다. 아이들이 수영을 배우는 모습을 봐도 된다는 개방적인 교실이라서 웬만한 학부모 못지않게 딸의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는 볼프강으로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우리의 비안카는 볼프강의 이 말을 듣지도 않았다. 그도 그럴것이 비안카는 볼프강을 조르기 시작했다.
“아빠, 나 크림파이 사줘.”
“딸, 아빠가 하는 이야기 하나도 안 들었지?”
“개헤엄 쳐서 딸이 자랑스럽다?”
“...그런 이야기 하나도 안 했어...”
이 마이페이스 사고는 도대체 누굴 닮은 건지...아, 날 닮았었지...볼프강은 가끔씩 잊고 지내는 사실을 이렇게 간헐적으로 억지로 떠올릴 때마다 무언가가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긍정적인 것도 아니고, 부정적인 것도 아닌 약간 애매한 그런 거.
...도대체 나는 무엇을 느끼는 것일까?
* * *
슈에가 파이를 다짜고짜 끌고 간 것은 낮에도 열리는 바(Bar)였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분위기가 마음에 든다며 거침없이 들어간 카페가 알고 보니 술을 파는 곳이었다. 낮부터 술이라니, 좀 마이너스한 느낌이 들었지만 다행히 간단한 요리는 곁들어 먹을 수 있다고 해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고 그걸 열심히 먹는 파이에게 슈에가 말했다.
“잘 지내고 있는 거 같아서 다행이야.”
“응?”
동생의 안도가 된다는 그 말투에 파이는 의아함을 느꼈다. 자기 자신은...언제나 잘 지냈다. 귀여운 딸과, 장난기는 많지만 그런대로 의지가 되는 남편. 안 행복할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동생의 저 걱정은 파이에게는 이해가 잘 되지 않는 푸념이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슈에는 아주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왜, 결혼하고서 얼마 안 지나서...언니가 고향으로 돌아온 적이 있었잖아.”
파이는 그만 먹던 올리브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만큼 당황한 탓이었다. 파이는 바닥에 떨어진 올리브를 주우면서 멋쩍게 말했다.
“아, 그때...”
일명 ‘그때.’ 파이, 그리고 볼프강에게 있어서 결코 기억하고 싶지 않은, 말하자면 흑역사에 가까운 그 순간. 그때는 아주 대단했지. 하나의 코미디 드라마를 보는 거 같은 기분이었어, 라고 당시 목격자인 슈에는 조금 담담히 말했다.
“그때는...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네.”
“그때, 난 언니와 형부가 분명 틀어지는 줄 알았어.”
그만큼 싸했으니까. 싸했다는 분위기에 비해 코미디 드라마라고 일컬어지는 것이 조금 부자연스러웠지만 어찌되었든 코미디 드라마는 맞았다. 싸했던 분위기 속에서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한 애정을 여과 없이 내비추었기 때문이다. 분명 삽질은 하는데 방향이 서로 반대이고, 박자도 잘 맞지 않았다. 슈에의 코미디 드라마라는 표현에 파이는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돌이켜서 보면 충분히, 특히 슈에에게는 그렇게 보이고도 남았다.
슈에는 글라스에 담겨진 액체를 빨대로 흔들면서 솔직한 동생의 심정을 말했다.
“정말 짜증나는 인간이라고 생각했어.”
“응? 선배가?”
“명색이 아내의 하나밖에 없는 동생에게 청첩장을 안 보내는 것부터가 난 정말 싫었다고!”
“아, 그거...”
나중에 들은 볼프강의 변명은 이러했다. 깽판 칠까 봐, 라고. 물론 볼프강의 이런 마음을 슈에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형부와 처제로 지내기에는 아직 이 두 사람은 어색한 게 너무도 많았다.
볼프강이 꽁해있는 것도 있지만, 슈에 쪽도 만만치 않게 꿍해있다는 것이 아마 이번 사태의 가장 큰 원인일 듯 싶었다. 그리고 이런 둘을 파이는 언제나 최선을 다해 중재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도, ‘그때’ 그랬던 것 치고 잘 사는 거 같아서 조금 마음이 놓여.”
“마치 내 말은 못 믿겠다는 표현 같아서 조금 서운하네.”
“당연하지. 언니는 너무 착해. 사람의 단점을 보려고 하지 않아! 하물며 그게 언니가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더욱 그렇지...그래서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그 이유만은 아니지?”
이번에 이 먼 독일로까지 찾아온 이유. 파이의 이 뉘앙스에 슈에는 못 속이겠다는 듯 피식 힘없이 웃었다.
“언니는 이상하게 이런 부분은 날카로워.”
“슈에를 몇 년이나 알고 지냈는데. 이 정도는 당연히 알아.”
“그럼, 다 이해한 걸로 알고, 이따 저녁에 형부 좀 몇 시간만 빌려갈게.”
“알았으니까, 무턱대고 검부터 뽑지는 말고. 알았지?”
“그건 그 사람 하는 거 봐서.”
슈에는 마지막으로 남은 베이컨을 포크로 콕 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