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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나를 버렸어...”
갑작스러운 딸의 충격적인 발언에 볼프강은 어이없어 하며 아무리 보아도 자신의 딸임이 분명한 외모를 가진 비안카에게 대꾸했다.
“내가 언제 널 버렸다고 그러니?”
“아빠가! 나를 버리고! 갔잖아!!!!”
“나 참, 수영 좀 배우라고 수영 교실에 데려다 준 걸 가지고 그렇게 표현하면 안 되지!”
게다가 비안카가 수영 교실을 가게 된 결정적인 원인은 볼프강이 아니라 파이에게 있었다. 볼프강은 아이는 자라면서 언젠가 필요에 의해 수영을 할 수 있게 될 거라는 낙관주의자였지만, 파이는 아이의 만약을 대비한 생존(!)을 위해서는 꼭 수영을 전문적으로 배워야한다는 걱정이 한 가득인 사람이었다.
그리고 예상했던 대로 아내를 도저히 이길 수 없었던 볼프강은 비안카를 수영 교실에 보내는 것에 찬성하였다.
아, 왜 두 사람이 이렇게 의견이 칼로 그은 듯 다른 이유는 볼프강은 수영을 할 줄 알았지만, 파이는 도대체 어찌된 이유에서인지 수영을 전혀 하지 못하였다.
아무튼 비안카의 주장대로라면 비안카를 버리고 간 것의 시발점은 엄마인 파이였다. 하지만 파이는 현재 유니온의 임무로 인해 독일에 없었다. 그러니까 결론을 말하자면, 대신 화풀이를 할 상대는 필요해서 애꿎은 볼프강에게 저렇게 화를 내는 것인데,
문제는 볼프강도 결코 자신의 딸에게 한사코 지지 않는 아버지였다.
“딸, 일단 정리는 하자. 우선 딸을 수영 교실에 보내자고 먼저 제의한 건 내 와이프다?”
“...아빠 아내 아니야! 비안카 엄마야!”
“아, 그래그래...내 와이프 겸 비안카의 엄마가 먼저 제의한 거야. 그리고 너는 아빠가 네 엄마를 이긴 적을 본 적이 있니?”
잠시 고민하던 비안카의 대답은 참으로 깜찍했다.
“...이번만큼은 이겼어야지!”
“비안카의 엄마인데, 내가 이겼으면 좋겠어? 진짜로?”
자신의 엄마를 너무도 좋아하는 비안카는 결국 백기를 들었다.
“...하, 알았어. 어떻게 여기에서 엄마 치트키를 꺼내?”
“딸...너 당분간 아빠랑 말 교정 좀 하자?”
그리고 볼프강은 다시 한 번, 저 말뽄새를 보면서 비안카가 자신의 딸이 맞음을 자각했다.
* * *
임무로 인해 독일 슈나이더 가(家)의 저택에서 오래 있지를 못하는 파이를 대신해 육아를 전담하고 있는 건 볼프강이었다. 유치원 등하원은 물론, 최근에는 수영 교실까지. 그래도 집에서 느긋하게 있을 수 있다고 생각은 했는데, 웬걸. 하루에 두 번 정도는 외출하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볼프강은 비안카를 사랑했다.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와의 결실로 맺어진 이 사랑스러운 아이를 안 사랑할 수가 없었다. 다만 부부가 육아를 같이 할 시, 아이와 좀 더 오랜 시간을 보내는 쪽이 상대적으로 엄격한 것이 좋다고 하여 아주 약간의 훈육을 하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저렇게 아빠의 앞에서 엄마가 좋아! 라고 말하는 비안카도 사실 따지고 보면 볼프강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언젠가 하원 시간보다 일찍 유치원에 들리니까 그곳에 있던 오후 시간대의 선생님들이 볼프강을 보며 아는 체를 많이 했다. 비안카가 아빠 이야기를 많이 해주었다면서. 듣던 대로 대단한 미남이시라면서. 이런 선생님들에게 둘러싸인 동안 볼프강은 대체 애가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했기에 선생님들이 단박에 자신을 알아볼 정도인가 싶었다.
그 때, 유치원 하원 차림으로 등장한 비안카가 선생님들에게 둘러싸인 자신의 아빠를 크게 불렀다.
-볼프강 슈나이더!
-...
좀...정상인 부르짖음은 없어? 아버지라던가, 아빠라던가, 파파라던가...그런데 왜 하고 많은 것 중에 풀네임을 부르냐고...그것도 유독 크게 소리를 질렀다. 그래서인지 비안카의 목소리를 듣고 나온 아이들이 비안카에게 물어보았다.
-비안카, 저 사람 누구야?
-우리 아빠.
어쭈, 저기서는 그래도 나름 정상적인 대답을 하였다. 그러면서 비안카는 정확히 볼프강을 가리키며 으름장을 내놓았다.
-비안카 거야.
-...
어째, 아내한테든 딸한테든 소유물 취급을 당하는 느낌이었다.
조금 시간이 흐른 후, 하원 전담 선생님에게 비안카가 아이들에게 자신의 아빠에 대해 많이 자랑을 하였다는 뒷사정을 듣게 되었다. 그래서 몇몇 아이들이 비안카의 아빠 자식 되고 싶다는 발언을 하였고, 이에 대해 딱 정색을 하며, 비안카가 말한 걸출한 답변은,
-아빠는 내 거야! 절대 못 줘!
...였다고 한다. 이걸 좋아해야할지 말아야 할지...일단 아주 그냥 아빠를 싫어하는 건 아니라는 결론이기는 하니 볼프강은 좋아하기로 하였다.
* * *
“비안카, 밥 먹자.”
어느 저녁,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는 딸을 찾기 위해 볼프강은 집 구석구석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비안카가 아지트로 만들어놓은 비안카의 놀이방 안으로 들어가자, 방문 뒤에 숨어 있던 비안카가 우악스럽게 볼프강을 잡아채며 놀래켰다.
“까꿍!”
하지만 볼프강은 이미 육아의 고수였다. 이미 여기에서 비안카가 나올 것을 예상한 – 이미 오래전부터 몇 번이고 당해보았으니까 – 볼프강은 잽싸게 나오는 딸아이를 가볍게 잡아채며 안아 올렸다.
“...넌 아빠 놀리는 거 취미냐?”
“치, 여기서는 깜짝 놀라 자빠지는 액션이 제격인데!”
심드렁한 반응에 비안카는 볼을 크게 부풀렸다. 그러자 볼프강은 익숙한 듯 딸의 볼 주머니에서 바람을 빼주면서 오늘 저녁 메뉴는 치즈를 올린 빵이라는 걸 알려주었다.
비안카의 누군가를 꼭 닮은 눈동자가 이렇게 물어보고 있었다. 단지 그것뿐? 어째 딸아이의 앞에서 이것저것 다 해야 하는 쉐프가 되어가는 기분이었다. 먹성이 좋은 비안카는 아주 이렇게 가끔씩 반찬 투정을 할 때가 있었다. 이것을 슬기롭게 잘 넘기지 못하면 큰 재앙이 닥치기는 하나 볼프강은 전혀 두렵지 않았다.
오늘의 저녁 식사 당번 볼프강에게는 비장의 무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볼프강이 검지를 올리며 비안카에게 제시했다.
“후식은 비(Bee, 비안카의 애칭. 꿀벌 같이 통통 튀어오르는 딸아이에게 잘 어울리는 애칭이라고 생각하여 볼프강이 종종 부르는 볼프강만의 비안카를 향한 애칭이다.)가 좋아하는 꿀벌 아이스크림.”
“...!”
“대신 오늘 저녁 다 먹어야 한다?”
어제 저녁을 갑자기 먹기 싫다면서 투정을 부리며 반 그릇 이상 남긴 딸에게 하는 말이었다. 그러자 비안카는 두 그릇도 먹을 수 있다면서 얼른 부엌으로 가는 것을 재촉하였다.
* * *
“...그런 일이 있었어.”
오늘 하루 종일 있었던 일들을 간략하게 파이에게 보고하는 데에만 한 시간이 걸렸다. 그만큼 줄이고 또 줄였지만 비안카의 하루하루는 다이나믹해서 어제 했었던 일을 똑같이 벌이지 않았다. 멀리 떨어져 있지만 하루에 한 번씩, 화상통화로 이렇게 입담이 좋은 볼프강의 입을 빌려 듣는 딸아이의 일상에 파이는 눈시울이 촉촉해졌다.
하지만 지적할 건 지적해야 했다.
-아무리 달래야 한다고 저를 인질로 삼으시는 건 아이들 정서에 좋지 않습니다, 선배.
“아니, 수영 교실 1시간 보냈다고 그렇게 토라지는 게 어디 있어...”
-비안카가 보기보다 아빠를 많이 좋아하니까요.
“그럴 거면 표현을 하라고, 표현을.”
-선배도 남말 할 때가 아닌데요?
난 이미 충분히 표현하고 있다고! 라는 볼프강의 반박에 파이는 비안카가 아니라, 라고 운을 뗐다.
-저한테 말이에요, 저한테.
“...”
-비안카에게는 이미 훌륭한 아버지인데, 어째 남편감으로서는 점점 점수가 떨어지고 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그러자 볼프강은 볼프강 특유의 나른한 분위기로 돌아와 파이의 말을 전면에서 반박해주었다.
“...그러는 파트너야말로 나한테도 표현 좀 해달라고.”
-아, 저도 남말 할 처지가 아니었군요.
“그래...다음 휴가는 언제라고 했지?”
-2주 후입니다. 3일 휴가, 받아놓았습니다!
무려 3일(!)이나 휴가를 받아놓았다고 의기양양하게 말하는 아내의 모습이 귀여워서 볼프강은 피식 웃었다.
“그래그래, 그럼 그 때의 독일에서의 스케줄은 나한테 맡겨놓으라고.”
-믿고 있겠습니다, 슈나이더 요원.
“네네, 저만 믿고 따라와 주시지요, 슈나이더 요원.”
뭐, 유니온 내에서는 ‘파이 슈나이더’가 아니라 ‘파이 윈체스터’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해서, 클로저 임무를 할 때는 후자를 사용하지만 엄연히 자신들과 같은 슈나이더 가(家)의 일원이란 말이지?
볼프강은 모니터 오른쪽 하단에 작게 위치한 x표시로 마우스 커서를 옮겼다. 아, 마지막 인사는 잊지 않았다.
“그럼 끊을게. 임무 수고하고.”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사랑한다, 파이 윈체스터.”
볼프강의 갑작스러운 선제공격에 파이는 얼굴이 순간 붉어지면서 뭐라고 말을 하려던 것 같지만, 이미 그 전에 볼프강이 솜씨 좋게 전화 연결을 끊었다. 가끔은 이런 장난을 치는 것이 재밌기도 하고 말이다.
...그러고 보면 비안카가 장난치는 걸 좋아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것이긴 하네. 이 장난을 쳤을 때 걸리는 상대방의 반응을 보는 게 재밌는 걸 볼프강도 알고, 비안카도 아주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오늘 밤도 이렇게 깊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