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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상황을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일단 제 이름은 볼프강 슈나이더, 토끼 같은 아내와 여우 같은 딸과 오순도순 살고 있는 평범한 독일인 가장이었습니다.
아, 원래 여우 같은 아내와 토끼 같은 딸 아니냐고요? 아니에요. 우리 집은 저게 원래부터 맞는 표현이에요.
아무튼 간에.
볼프강 슈나이더, 인생 일대에 아주 큰 고난에 직면하였습니다.
“자요, 미스터 슈나이더 씨.”
“...”
제 앞에 이름 모를 칵테일 잔 하나를 들이미는 아내와 똑같이 생긴 여자.
네, 저는 딸과 집으로 돌아가던 중, 아내의 쌍둥이 여동생에게 납치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 * *
“엄마, 엄마!”
비안카의 목소리에 파이는 순간 눈을 떴다. 나른한 오후 시간이어서 그랬나. 깜빡 잠이 들었던 것 같다. 비안카의 목소리, 그것도 다급함이 묻어나오는 딸의 목소리에 파이는 방금 막 일어난 사람 같지 않게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때를 맞추기라도 했는지, 바로 거실에 당도한 비안카와 마주하였다. 파이는 방금 막 잠에서 깨어난 사람 같지 않게 민첩하게 자신에게로 뛰어오는 비안카를 안아들었다.
비안카를 안아주며 토닥이며 파이는 안부 인사 – 슈나이더 가는 외출 전과 외출 후의 인사를 꼭 하는 편이었다. 파이의 정성어린 예의범절 교육 탓이었다 – 를 하였다.
“비안카, 수영 교실에 잘 다녀왔나요?”
“네, 잘 다녀왔어요!”
그러면서 비안카는 막 오늘 수영강습에서 있었던 일을 조잘조잘 설명하기 시작했다. 딸의 긴박한 목소리에 혹여 무슨 일이 있었나 싶었던 파이는 그저 빨리 자신에게 오늘의 모험담을 전하고 싶었기에 그랬던 것이라고 점차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건 단순히 파이의 착각이 아니었다. 수영 교실에서의 무용담이 마무리될 쯔음, 비안카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이 뒷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엄마, 아빠가 납치되었어요.”
“...??”
이것은 마치, ‘아빠가 볼일 있다고 비안카는 먼저 집으로 들어가라고 했어요.’ 와 같은 의미로 쓰인 것 같은 담담함으로 일관된 어투였다.
파이는 순간 자신이 잠이 덜 깨서 – 이미 잠기운은 사라진지 오래인데도 불구하고 딸아이의 입에서 나온 말이 너무도 터무니가 없어서 – 잘못 들은 줄 알고 비안카에게 차분히, 다시 물었다.
“비안카, 엄마가 잘 못 들어서 그런데 다시 말해주겠어요?”
“아빠가, 집 앞에서 납치되었어요.”
“...”
...파이가 절대 잘못 들은 건 아니라는 소리였다. 아이는 똑같은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그제야 파이는 비안카가 집안으로 뛰어 들어올 때의 그 다급함이 그쪽이 아닌 이쪽 때문이라는 걸 깨달았다.
파이는 조금 얼이 빠진 목소리로 비안카에게 두 번째 질문을 하였다.
“...그래서, 아까 집으로 들어올 때 그렇게 다급하게 엄마를 불렀던 거예요?”
“네!”
활기차게 대답하는 그 얼굴은 남편과 너무도 닮아 있었다. 그래서 파이는 잠깐 혼란스러워졌다.
...분명 긴급한 상황인 건 맞는데, 이 태연함과 침착함은 도저히 어린 아이의 것은 아니었다. 이마저도 파이가 사회 초년생이었던 시절, 사수였던 남편의 그 태만한 태도와 ‘또’ 닮아있어서 그냥 파이는 ‘우리 딸은 남편을 똑같이 닮았구나.’라고 얼렁뚱땅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리고 남편 납치범(?)의 정체는 알 것 같았다. 그야, 그 순간의 유일한 목격자가 파이에게 선선히 불었기 때문이었다.
“슈에 이모가, 아빠를 끌고 어딘가로 가버렸어요. 비안카는 못 가는 곳이래요.”
“아...”
그러고 보니 저녁 때 몇 시간만 볼프강 좀 빌리겠다는 슈에의 말이 떠올랐다. 파이가 달콤한 낮잠을 자고 있는 틈을 타, 아마 집 앞에서부터 볼프강이 돌아오기를 자세 잡고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목표물이 나타난 그 순간! 나비처럼 날아올라 벌처럼 볼프강의 목에 헤드락을 걸고 어딘가로 끌고 갔을 것이다.
슈에가 목표물을 제압하는 그 순간, 그것을 상상의 나래를 펼친 파이는 순간 감탄했다. 역시, 암살 일족의 타고난 천재다운, 그야말로 완벽한 제압 과정이었다. 자기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을 것만 같은 완벽함.
사건(?)의 모든 전말을 알게 되니, 파이도 비안카처럼 침착해지게 되었다. 난 또...그냥 형부 vs 처제의 사건 제265회차의 시작인 거구나, 하고 말이다. 물론 이걸 옆에서 루나가 보았다면 ‘전혀 평범한 일은 아닌 거 같은데요!?’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렇게 슈나이더 가(家)가 비일상에서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는 데는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슈에 이모와 아빠는 저녁 먹고 들어올 거 같으니, 오늘은 비안카와 엄마 단 둘이서 저녁이나 먹을까요?”
“볶음밥 먹고 싶어요!”
“네, 볶음밥 해줄게요.”
...이렇게 태연히 저녁 식사 메뉴나 고민하고 있는 토끼 같은 아내와 여우 같은 딸을 면전에서 보았다면 볼프강은 조금...아주 조금 오열했을지도 모르겠다.
* * *
“...”
“...”
“...”
“...”
가게에는 이상한 적막감만 흘렀다. 가게 안에는 딱 세 사람뿐이었다. 그 중 한 명은 이 칵테일 바의 주인장이었고, 두 명은 손님이었다. 여자 손님에게 범상치 않은 모양새로 끌려온 남자 손님은 여자가 제멋대로 주문하여 건네준 칵테일을 마시지도 않고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그에 비해 여자 손님은 벌써 몇 잔이나 들이키고 있는지 모르겠다.
보다 못한 슈에가 볼프강에게 재촉했다.
“안 마셔요?”
슈에는 일부러 중국어로 물어보았다. 독일인 오너는 들으면 안 되는,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가 싶어 볼프강도 배운 지 얼마 안 된 중국어로 대답했다.
“술...술은 내가 진즉에 끊어서 말이야.”
“...”
능숙한 중국어다. 볼프강의 어학 실력은 유니온에서 제공하는 자동 번역 장치에 의존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 정도라고 파이에게 얼핏 들었는데 이 정도인줄은 몰랐다. 그래서 슈에는 보기 드물게 순수한 감탄을 볼프강에게 내비쳤다.
“중국어 잘하시네요.”
“듣는 것만 어느 정도 들리는 정도야.”
“너무 겸손하시네요.”
어느 정도 언어는 통하는 상황이니, 슈에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저랑 있는 게 그렇게 불편하세요?”
“...”
“불편하구나.”
단정 짓는 슈에의 태도에도 볼프강은 묵묵부답이었다. 슈에는 일단 작전은 보류, 라며 속으로 혀를 찼다. 볼프강의 이러한 태도 때문에 취기라도 오르면 그나마 속마음을 보여줄 것 같았는데, 볼프강이 갑작스러운 금주 선언을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볼프강의 이러한 태도가 슈에에게는 영 껄끄러운 것도 아니고, 또 그렇다고 막 마음이 신경 쓰이는 것도 아니였다. 현재로선 유일하게 취기가 오른 슈에가, 솔직하게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았다.
“알아요, 미스터 슈나이더 씨가 저 불편하다는 거요.”
“...”
“그런데 불편해야하는 게 정상이니까, 난 미스터 슈나이더 씨 이대로 내버려두고 있는 거예요.”
이런 말까지 들었는데도 볼프강은 소금기둥처럼 가만히 있었다. 볼프강도 슈에의 이런 속마음을 알고는 있었다. 알고는 있었다고 해도 확인사살은 전혀 감정이 서운할 법도 한데 그렇지도 않았다. 이런 말까지 들었는데도 ‘난...처제 소리를 자기 입에선 죽어도 듣기 싫다는 처제한테 확실히 미움 받고 있구나...’ 라며 잠깐의 탄식만 할뿐이었다. 그뿐이었다.
놀랍도록 침착한 – 아니면 긴장해서 무슨 대화가 오고 가는 건지 바로 사태 파악이 안 되는지 – 볼프강에게 슈에는 처음으로, 자신의 마음속에 숨겨두었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사실 이번에 독일에 온 것도 파이나 비안카가 아닌, 볼프강을 직접 얼굴을 보고 마주하고 싶어서였다.
이대로 가다간 영원히 꺼낼 수 없을 ‘비밀’ 같아질 것 같아서.
“그거 아세요? 미스터 슈나이더 씨, 첫인상 사실은 좋은 편이었던 거?”
“어...?”
볼프강은 자기도 모르게 조금 얼빠진 리액션을 보였다. 슈에의 반쯤 감긴 눈이 그런 반응은 예상했다며 능숙하게 말을 이어갔다.
“사실 언니가 행복해보이니까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어요. 언니는...나랑 다르게 바깥세상으로 무한정 나아갈 수 있는 존재니까. 그렇기에 언니가 클로저 일로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는 건 괜찮다고 생각했어요. 다만 언니에게는 바깥세상에서도 ‘거점’ 같은 게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죠.”
일부러 ‘거점’이라는 표현을 슈에가 입에 올렸지만 사실 슈에가 표현하고 싶었던 단어는 좀 더 낭만적인 것이었다. 이정표, 휴식처, 닻을 내릴 수 있는 항구 등...그런 것이었다.
그럼에도 일부러 ‘거점’이라고 하는 딱딱한 단어를 쓰는 건 볼프강에 대한 최후의 심술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볼프강은 그 표현마저도 감지덕지로 받아주었다는 것이었다.
“내가...바로 그 ‘거점’이라는 이야기인가?”
“그렇죠...지금 언니의 남편이 본인이시잖아요.”
“...”
“난 미스터 슈나이더 씨보다도 언니의 행복이 더 우위에 있으니까요.”
어찌되었든 슈에는 파이의 결혼식에 갔으면 무조건 축하해주었을 거란 소리였다. 볼프강이 생각하는 ‘최악의 상황’은 절대로 생기지 않았을 거란 소리였다. 이 말을 듣고 나니 볼프강은 자신이 큰 결례를 하나뿐인 처제에게 보였다는 걸 깨달았다.
“그럼 언제부터 나에 대한 인상이 점차 안 좋아졌던가?”
“언니와 나는 쌍둥이에요. 똑같이 생긴 얼굴, 목소리...대략적인 것은 같지만, 세부적인 것은 다를 수밖에 없어요.”
마을 안에서 모든 것을 가진 나. 나로 인해 언니는 꽤나 괴로운 시기를 보냈어요. 슈에가 말하는 이들 자매의 어린 시절은 볼프강도 대략 알고 있었다. 파이가 말해준 탓이었다. 슈에가 묘사하는 파이는 이 세상의 불행이란 불행은 다 가진 소녀처럼 보였다. 그래서인지 슈에는 어느 날부터, 언제인지는 모르는 어느 날부터 한 가지 결심을 하였다.
시작은 당찼으나, 결과는 대실패였지만 말이다.
이를 두고 슈에는 이렇게 표현했다.
“그저 철없는 소녀의 과분한 욕심이었어요. 내가 언니에게 ‘무언가’가 되어주고 싶었다니...”
애초에 마을 밖을 자유로이 돌아다니는 파이에게 있어서 슈에는 ‘거점’이 되어줄 수 없었다. 사는 세계가 어쩔 수 없이 달라지기 시작했으니까. 이에 대해 볼프강은 겸손하게 유감을 표했다.
“...그걸 내가 눈치 없게 가로챈 거군.”
“가로챈 게 아니죠. 내가 아니라 볼프강 슈나이더 씨니까 가능했던 거예요.”
그랬기에 슈에의 볼프강에 대한 첫인상은 나쁜 편은 아니었다. 오히려 좋은 축에 속했다.
그런데 말이다...사람의 감정이 뒤바뀌는 건 어느 한 순간이 일이었다. 좋은 감정으로든, 나쁜 감정으로든 말이었다.
“그런데 말이에요...볼프강 슈나이더 씨도 알 거 아니에요...머리로는 이해해도, 마음은...아니, 마음 한 쪽 구석에서만큼은 따를 수가 없는 상황이 있다는 거요.”
파이가 슈에의 앞에서 절대로 보여주지 않았던 표정을 볼프강의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것을 보았을 때, 슈에는 자신의 한계를 절감했다. 한편으론 파이가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게 되어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저런 언니의 행복에 가득 찬 얼굴...내가 꼭 만들어주고 싶었는데, 라는 일종의 현실부정도 생겨났다.
그 결과의 연장선상이 지금 현재 이렇게나 서먹한 형부와 처제의 관계라는 거군. 볼프강은 조금 숙연해졌다. 이에 대해 슈에는 그건 아니라는 듯, 이런 말을 덧붙였다.
“그런데 그건 내가 탓할게 아니었어요. 애초에 언니 보고 멀리멀리 나아가라고 말한 게 나였으니까요.”
“...”
“그 말을 언니한테 했던 시점부터 난 이런 것도 다 감당해야 했는데, 그냥 내가 철이 없었던 거죠.”
더 이상 칵테일이 들어가지 않는지 슈에는 술이 반 넘게 남은 잔을 내려놓으며 조용히 볼프강을 불렀다.
“형부.”
“...!”
다정하게 자신을 그렇게 지칭하는 슈에에게 볼프강은 눈을 크게 깜빡였다. 슈에는 마지막으로 당부할게 있다고 하였다.
“언니를, 잘 부탁할게요. 또 저번처럼 언니가 울면서 고향으로 내려오면 현(現) 암살 일족의 수장(首長)으로서 당신을 처단할 거예요.”
중간 부분부터는 본래 볼프강이 아는 슈에로 되돌아간 것 같았지만 그래도 볼프강은 괜찮았다. 큰 용기를 내준 슈에에게 볼프강은 장단에 맞추어 이런 대답을 해주었다.
“협박 아닌 부탁...인거 맞지?”
“그건 형부 재량껏 상상하세요.”
슈에가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파이와 무척 닮아 있었다. 그야 어쩔 수 없었다. 파이와 슈에는 쌍둥이인 것을.
* * *
“슈에와는 이야기 잘 나누었나요?”
저녁 시간이 지난 후에 들어온 볼프강을 맞이하며 파이가 물었다. 슈에가 먼저 슈나이더 가(家)에 들어왔을 때도 파이는 똑같은 질문 - “선배와 이야기 잘 나누었어?” - 을 했다. 이에 슈에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그건 당사자한테 한 번 물어봐~” 라며 먼저 자러 갔다.
파이의 물음에 볼프강은 아무 말도 없었다. 그걸 참을성 있게 기다리던 파이에게, 볼프강은 조금 박자가 엇나가게 파이를 불렀다.
“파트너.”
“네.”
그리고 대답이 끝나는 순간, 볼프강은 파이를 억세게 껴안았다. 무슨 일이지, 싶었지만 볼프강의 몸에선 취했을 때의 나는 그 특유의 술 냄새는 나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 파이를 감싸고 있는 것은 파이가 좋아하는 볼프강의 체향뿐이었다.
볼프강은 파이에게 이렇게 자신의 다짐을 읊었다.
“내가 더 잘할게...”
“...”
“꼭 행복하게 해줄게...”
그 두 문장만으로도 파이는 슈에와 이야기를 잘 끝냈다는 걸 깨달았다. 이어 울먹일지도 모르는 볼프강의 등을 토닥이며 파이는 이렇게 대답해주었다.
“전 이미 지금도 충분히 행복한 걸요.”
그러니까 선배...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