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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안카의 방에서 나온 볼프강을 향해 읽고 있던 책에서 시선을 볼프강에게로 돌린 파이가 물었다.
“비안카는요?”
“이제 막 잠들었어. 엄마랑 더 놀고 싶다는 거 간신히 동화책 5권 읽어주는 거로 무마했어.”
어쩐지 목소리 끝이 약간 갈라진 게 느껴지는 볼프강의 한숨 어린 푸념에 파이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읽고 있었던 책 - 『아주 쉽다! 독일어 기초 문법』 이라는 책이다 –을 소파 바로 앞에 있는 탁상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볼프강은 아주 자연스럽게 파이의 옆에 안착했다. 이제 부부만의 소중한 대화 시간인 것이다.
볼프강은 파이가 방금 전까지 진지한 얼굴로 읽고 있던 책의 정체를 알자마자 눈살을 저절로 찌푸렸다.
“너무 열심히 공부하는 거 아니야? 간단한 독어 회화 정도는 되잖아?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하지만, 비안카가 나중에 자랐을 때에 혹시나 독일어 문법 숙제가 있다면서 저한테 물어볼 수 있잖아요.”
“...적어도 10년은 앞서갔어.”
볼프강은 매사에 성실한 파이의 가치관에 별로 토를 달 생각은 없었으나, 가끔은 적당히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파이는 항상 모든 일에 열심이었다. 그 탓에 무리하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갑자기 쓰러진 적도 있었다. 아내에 대해 진심 어린 걱정을 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파이의 한참을 앞선 걱정에 볼프강은 이에 대한 답변을 내놓았다.
“걱정 마. 비안카 문법 공부는 내 담당으로 해둘 테니. 당신은 전혀 신경 쓰지 마.”
“가르치는 선생에 대한 신뢰도가 바닥을 치니까 이러는 거 아닙니까...”
“...나 그래도 비안카한테는 아주 좋은 아빠라고?”
“좋은 아빠가, 좋은 선생님이 되리라는 법은 또 없습니다.”
결혼을 하고 나서 아이가 생긴 후부터는 두 사람의 대화 주제는 언제나 자신들의 아이인 비안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잘 먹고, 잘 자고, 무럭무럭 잘 크는 자신들의 아이의 하루하루가 항상 처음이었던 두 사람이기에 더욱 그랬다.
볼프강은 약간 서운한 듯이 말했다.
“너무하네, 파이 윈체스터.”
“...또 무슨 트집을 잡으시려고.”
볼프강이 ‘당신’ 또는 ‘파트너’ 라고 말하지 않고, ‘파이 윈체스터’ 라는 호칭으로 부를 때는 그 뒷말은 꼭 자신을 향한 핀잔 및 트집이 깃들어져 있었기에, 파이는 약간 의심스런 눈초리로 볼프강을 바라보았다. 볼프강이 말했다.
“일주일 만에 만난 사랑하는 남편에게 하고 싶은 말이 하나도 없는 거야?”
“무슨...”
“비안카만 당신 보고 싶어한 줄 알아? 나도라고.”
“...!!”
참고로 볼프강은 공과 사에 대해 아주 선을 잘 지키는 사람이었다. 이건 가족이라고 불리는 집단 안에서도 예외인 것은 아니라, 비안카를 대하는 볼프강과 파이를 대하는 볼프강은 아주 다른 인물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후자인 경우에는 이렇게 애정을 일부러 숨기지 않는데, 전자일 때에는 글쎄...그런대로 딸에게 더 집중을 하고자 하는 느낌이랄까?
비안카가 잠이 들었다. 이 문장 하나로 파이는 그 뒷일을 대략적으로 예측할 수 있어야 했다. 파이는 괜히 헛기침을 하며 볼프강을 있는 힘껏 말렸다.
“선배...전 선배가 그런 말 하는 거 아직도 익숙하지 않습니다.”
“익숙해지라고. 이제 7년이 가까워지는데. 뭐, 그런 당신 얼굴 보는 건 매번 질리지 않으니 넘어가도록 할까?”
“...”
볼프강은 항상 여유가 넘쳤다. 그에 비해 파이는 한없이 서투르게 보였다. 도저히 어떻게든 메꿀 수 없는 4년이라는 나이 차이가 이렇게 영향을 주리라고 사귀기 시작했을 때의 파이는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어쩔 줄을 모르는 파이에게 볼프강은 툭 던지듯이 답했다.
“그냥 이러면 되잖아. ‘나도 보고 싶었어요.’ 라고.”
“...”
“그 말은 차마 입에서 안 떨어지겠다는 표정은 뭐야? 나 안 보고 싶었어? 진짜로?!”
“...보고 싶기는 했습니다. 그런 걸로 하죠.”
저 두루뭉술한 답은 또 뭐야. 그런데 저런 퉁명한 답임에도 좋아하는 자신을 발견해서 볼프강은 미칠 지경이었다. 파이 윈체스터, 이 엄청난 행운을 모조리 가지고 있는 사람. 자신과 자신의 딸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행운아.
볼프강은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나저나 내일 사냥터지기 성에 다녀올까 해.”
“아...곧 비안카 건강검진 날인가요?”
“그도 그렇지만, 오랜만에 얼굴이나 볼까 하고.”
6개월에서 1년 간격으로 비안카의 건강검진을 재리에게서 받는다. 현재의 비안카는 위상력에 각성한 상태는 아니나, 부모가 위상능력자라는 점에서 만일을 대비한 경우에 대비해 정기적으로 유니온에 건강검진을 받고 있던 것이었다. 그리고 볼프강과 파이는 그 임무를 재리에게 일임하였다. 자신들의 전(前) 관리요원 겸 자신들의 친구로서 말이다. 이에 대해 재리는 흔쾌히 승낙했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재리는 비안카를 무척 귀여워했다. 파이가 물었다.
“저도 같이 가도 될까요?”
“그래도 되지. 당신 얼굴 본 지 오래되었다고 말썽쟁이들이 난리도 아니더라고.”
“아, 루나와 소마, 세트...잘들 지내고 있나요?”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게 어때? 내일 같이 가자고.”
어차피 4인승용차로 가는 것인데 2명에서 3명으로 늘어난들, 기름 값이 더 드는 것도 아니었다. 볼프강의 제안에 파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말을 첨언하면서.
“그러고 보니 저도 재리에게 볼일이 하나 있었네요. 마침 잘 되었군요.”
“볼일? 무슨 볼일?”
“비밀입니다.”
파이는 배시시 웃었다.
* * *
“이모랑 삼촌 보는 거야?! 우와, 신난다!”
“비안카, 그렇게 기분이 좋나요?”
“네!!”
아침에 일어난 비안카가 사냥터지기 성에 간다는 볼프강의 말에 보인 반응이었다. 비안카는 이모와 삼촌들을 좋아했다. 물론 혈연으로 이어진 관계는 아니나, 비안카에게는 가족이나 다름없었다. 재리 삼촌도 좋았고, 루나 이모와 소마 언니도 좋았다. 거기에 말하는 멍멍이 빅터 삼촌까지도!
“빅터 삼촌에게 또 목마 태워달라고 할 거에요!”
“비안카는 목마를 좋아했지요. 또 하고 싶은 거 있나요?”
“음...루나 이모한테...!!”
파이가 비안카와 열심히 대화하면서 아침을 먹이는 동안, 볼프강은 차에 간단하게 짐을 챙겨 넣었다. 독일 내에서의 운전은 언제나 볼프강의 몫이었다. 파이가 자신 또한 운전을 배울까라는 말을 했을 때 볼프강은 단번에 저지했다. 어차피 운전면허가 원래부터 있었던 자신이 운전을 하는 게 더 효율적이었으며, 이 나라 저 나라 바쁘게 돌아다니는 파이에게 또 다른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파이 혼자 독일 집에 머무르는 시점에서 사냥터지기 성으로 홀로 가는 것에는 많은 제약이 따랐다. 아마도 사냥터지기 성으로 직접적으로 향하는 대중교통이 없다는 게 큰 문제일 것이다. 택시를 타고 가도 되었으나, 시내 부근에 위치한 슈나이더 가문의 집과는 달리 사냥터지기 성은 인적이 드문 숲속 깊은 곳에 있었다. 그래도 루나와 소마를 비롯한 사냥터지기 식구들을 사냥터지기 성에서만 볼 수 있는 건 아니라서 – 직접 슈나이더 가문 집으로 깜짝 기습 방문을 하기는 한다 – 비안카가 사냥터지기 식구들을 자주 못 보는 건 아니었다. 3일 전만해도 루나가 출장을 다녀오는 길에 잠시 들렀다는 핑계로 비안카와 반나절 정도 놀아주고 갔었다.
사냥터지기 이모와 삼촌을 아주 좋아하는 비안카야 그렇다 쳐도 파이는 정말로 사냥터지기 식구들을 보기 힘든 편이었다. 그래서인지 볼프강의 눈에는 비안카와 파이 둘 다 몹시 기대하고 있는 눈치가 보였다. 비안카는 멋스러운 궁전을 놀이터 삼아 뛰어놀 수 있다는 점에서 사냥터지기 성을 가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이었고, 파이는 순수하게 오랜 지인들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좋아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어젯밤에 재리를 만나야한다는 파이의 말이 불현 듯 떠올랐다.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비밀이라고까지 하는 걸까? 이상하게 궁금해졌다. 그래도 엄연히 때가 되면 알려줄 테니 기다리기로 했다. 아내인 파이를 굳건히 믿는다는 점도 있었지만, 사실 볼프강은 파이가 재리에게 개인적인 업무가 있다는 말만 들으면 피할 수 없는 ‘그 사실’ 이 계속 맴돌아서 직접적으로 알고자 하는 건 꺼려하는 편이었다.
아침을 먹은 슈나이더 가족은 차에 탑승했다.
비안카가 타는 차의 위치는 항상 조수석 뒷자리였다. 꼼꼼하게 안전시트를 체크하는 볼프강을 뒤로 하고 파이는 먼저 조수석에 올라탔다. 운전석에 볼프강이 앉았을 때에 파이는 알약 하나를 삼키고 있었다. 멀미약이었다.
볼프강은 걱정스럽다는 듯이 곁눈질을 했다.
“아직도 멀미 심해?”
“조금은 고쳐졌다고 생각했는데...아직은 아닌가 봅니다.”
“무리하지 마. 잠이라도 자.”
비안카가 있으니 가는 내내 심심하지는 않을 거야. 슈나이더 가 집에서 사냥터지기 성까지는 자가용으로 대략 한 시간이 걸렸다. 긴 운전이 심심할 법도 하지만 누구를 닮았는지 말빨이 엄청난 따님 덕에 대화거리는 줄어들지 않는다. 차를 타고 가면서 창문 밖을 구경하는 걸 좋아하는 비안카는 차를 타면 잠을 잘 자지 않는 편이었다. 반면 파이는 차만 타면 급격한 잠을 이겨내지 못하고 수면을 취하는 편이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차가 출발한 지 5분도 지나지 않아 파이는 잠들었다. 아마 출장으로 인한 피로도 없지 않아 있었으리라. 창밖을 보며 계절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는 비안카가 돌연 볼프강을 불렀다.
“아빠.”
“응?”
“노래 틀어줘.”
볼프강은 대꾸는 하지 않았지만 어린이용 동요 CD의 한 트랙을 틀었다. 「어린이를 위한 클래식 음악」 이라는 CD를 틀은 모양이다. 곧장 들리는 음색이 아주 현란하고 경쾌한 현악 4중주였다.
이 음을 수백 번이나 들었던 비안카는 바로 소리를 질렀다.
“페터와 늑대(Peter und der Wolf)!”
“그러네, 우리 따님이 아주 좋아하는 곡이네.”
“응, 나 이거 아주 좋아.”
비안카는 곧장 플루트 파트를 콧노래로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볼프강은 잠시 그런 딸에게 시선을 거두고 눈앞에 있는 도로에 집중하기로 했다. 파이와 단둘이 자동차를 탄 적은 있었다. 그럴 때에 볼프강은 한손으로 운전대를 돌리는 등의 만행도 가했는데, 비안카가 있을 때는 양손으로 운전대를 꽉 잡고 운전했다.
딸이 타고 있습니다, 안전 안전 안전이 그 무엇보다도 우선시입니다.
1시간가량 걸려 사냥터지기 성에 도착했다. 고풍스러운 낡은 대문이 열리면서 슈나이더 가족의 차를 환영했다. 아마 5분 내로 말썽쟁이들이 이들을 맞이하러 올 것이다. 주차공간을 따로 표시해두지 않는 곳이기에 볼프강은 그냥 적당히 보이는 데에 적당히 주차했다. 차의 엔진 소리가 멈추자마자 긴 잠에 빠져있던 파이가 눈을 떴다. 여직 졸음이 다 가시지 않은 표정으로 파이가 볼프강에게 말했다.
“...도착했습니까?”
“응, 잘 잤어?”
“네, 잘 잤습니다...”
역시 우리 집 차는 시트 감촉이 좋네요. 잠이 아주 잘 옵니다. 파이의 너스레를 들으며 볼프강은 곧장 뒷좌석으로 향했다. 도착했다는 말에 자기 혼자 시트를 야무지게 풀어내려는 비안카를 말리기 위해서였다.
“가만히 좀 있어봐, 딸.”
“나 빨리 빅터 삼촌 보고 싶은데...”
“루나 이모는 얼마 전에 봐서 1순위에서 제외한 거야?”
“아니야! 루나 이모도 좋은데, 오늘은 빅터 삼촌이 더 보고 싶은 것뿐이야...아빠, 빨리 줄 좀 풀어.”
“누가 이렇게 줄을 엉키게 했는데...”
서로 투덜거리는 부녀를 보면서 파이가 가장 먼저 차에서 내렸다. 한숨 자고 일어났던 터라 가볍게 기지개도 켰다. 숲속 깊이 위치한 곳이라 도시 내에 있는 집과는 전혀 다른 공기 질감이다. 상쾌했다. 기지개를 킨 겸 가볍게 목도 한 바퀴 빙 돌리는데 저쪽이 시끄러워졌다. 낮은 목소리를 가진 자신의 딸이 기쁨에 겨워 꺅꺅 한 옥타브 높은 목소리를 내는 소리, 그런 비안카에게 약속이라도 한 듯 똑같은 제스처와 반응을 보이는 여성의 목소리 두 개. 아마도 비안카가 루나와 소마를 만난 모양이다. 여전히 스트레칭을 하는 중인 파이의 옆에 볼프강이 다가왔다.
“그럼 난 잠깐 성 산책 좀 하고 올게.”
“...그러셔요.”
“정확히 1시간 정도 걸릴 거야.”
정확하게 시간까지 예측해주는 걸로 보아 재리한테 어서 볼일 보고 오라는 신호였다. 그리고 개인적인 일이라고 했기에 – 그렇게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았으나 볼프강의 눈치로 보아 – 일절 캐묻거나 엿듣지는 않겠다는 의사의 표시이기도 했다. 쿨하게 산책길을 찾아서 가는 볼프강의 뒷모습을 보면서 파이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고맙습니다, 선배. 그리고...그 쪽 길은 막다른 길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