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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단편)

[볼프파이] 190508

애쿼머린 (루이벨라) 2019. 5. 8. 23:31

 어느 유서 깊은 도시에는 르네상스 시대쯤에 만들어진 오래된 분수대가 하나가 있다고 했다. 관광객들은 그 분수대의 고풍스러움과 오랜 세월을 견딘 인내력에 감탄을 자아내지 못한다고 한다. 허나 이 분수대가 유명해진 것은 앞선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바로, 일명 ‘천생연분을 만나게 해주는 분수대’ 라는 것이었다. 그 분수대의 효험에 대한 증언은 인터넷에 카더라 소식으로 들려온 게시물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이 분수대의 영험함을 무언가에 단단히 꽂혀버린 독실한 신자같이, 그렇기에 한없이 진지한 말투로 주장을 하였다.
 
 이에 이 분수대는 그 유명세에 힘입어 수많은 젊은 남녀들의 필수 배낭여행 코스로 자리 잡게 된 것이었다. 물론 볼프강은 그런 거 믿지 않았다. 그냥 우연의 일치로 일어나게 된 것이, 이런저런 유명세를 타서 확률이 늘어나게 된 것일 뿐일 테니까. 사람이 기하급수적으로 많아지면 당연히 그 안에서 A라는 사건이 일어나는 건수는 높아진다. 볼프강은 그걸 아주 담백하게 주장하고 있는 이유는, 실제로 이 분수대에 들렀던 수많은 관광객들에 비해 자신의 천생연분을 찾았다는 사람의 수는 극히 적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별건 없는 분수대인줄 알았지만...선배님 말대로 옆에 새겨진 조각상들은 꽤나 예술이네.’
 
 미술학도 겸 역사학도인 볼프강 슈나이더는 분수대 앞에서 서서 하찮은 감상평을 내렸다. 몇 년 전 이 분수대에 왔다는 선배의 말 그대로였다. 조각상은 르네상스시기에 흔히 볼 수 있는 양식을 띄고 있었으며, 오랜 세월 풍마와 싸워서 형편없이 갈라진 곳도 있었다. 그냥 이 분수대를 관광 자원으로만 냅두려는 생각일까? 이 시(市)의 형편없는 문화재 의식에 볼프강은 한탄했다.
 
 볼프강은 요 앞 광장의 푸드 트럭 – 유명 장소이다 보니 이른 점심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먹을 것을 파는 트럭은 많은 편이었다 - 에서 사온 샌드위치를 분수대 바로 앞에서 우물거렸다. 구운 생선 – 생선 이름은 모르겠다 – 샌드위치는 처음 먹어보지만, 의외로 입에 잘 맞아서 같은 트럭에서 사온 깔끔한 맛의 아메리카노와 제법 잘 어울렸다.
 
 선배의 말대로 오지 않았으면 후회...까지는 안 할 정도의 근사한 유물은 아니었지만, 보러 온 건 잘했다는 느낌이 드는 10분이었다. 샌드위치를 마저 다 먹은 볼프강은 뒤이어 카메라를 들었다. 이유는 분수대의 흠집이 난 곳을 제대로 기록해두기 위해서이다. 이런 것이 자신의 전공에 대한 고질병이라고 생각하자니 볼프강은 씁쓸해졌다.
 
 그러나 이런 작업 또한 마음 놓고 오랫동안 할 수 없었다. 초여름의 이 도시는 곧장 소나기를 내뿜는 것을 좋아했다. 변덕스럽게, 그래서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는 것을 즐기는 것처럼. 소나기가 쏟아지자 분수대를 빙- 둘러싸고 탑돌이를 하는 것 같았던 사람들은 그새 사라졌다. 볼프강은 마저 아쉬워서 근처에 천막을 약간 드리운 – 가게 문은 닫은 거 같았다 – 가게 앞에서 비를 피하기로 했다.
 
 볼프강은 자신의 대학 생활을 같이 한 파트너가 행여 변덕스러운 비에 젖지 않았나 싶어서 이리저리 매만져보았다. 카메라는 무사했다. 그와 더불어 여유가 생기자 볼프강은 빗속에 잠긴 분수대를 똑바로 마주볼 수 있었다.
 
 유명세를 탔다는 분수대라고는 하지만, 이런 작은 고난에도 버티지 않고 분수대를 홀로 두고 간 사람들을 생각하자니 문득 쓸쓸해지는 기분이었다. 지금 분수대와 그나마 같이 있는 사람은 볼프강 밖에 없었다. 비에 젖어있기 때문일까. 그와 더불어 하늘도 회색빛으로 흐릿했기 때문일까? 분수대는 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볼프강은 카메라를 들었다. 비 감성에 젖은 사진을 찍어보는 것도...나쁜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셔터를 몇 번이나 눌렀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마지막 셔터를 누르려던 찰나에, 볼프강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천막 안으로 들어오는 윤곽이 카메라에 고스란히 들어왔다.
 
 볼프강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렌즈에서 눈을 떼었다. 그 직후, 그가 본 것이 환영이 아니라는 듯이 아주 가까운 옆에서 낯선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아, 비라니...하늘도 무심하시지.”
 
 여자는 그렇게 말했지만 볼프강은 여자가 한 말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여자는 볼프강이 쓸 수 있는 언어가 아닌 다른 나라의 언어를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여자의 몇몇 행동 덕에 여자가 처한 상황이 어떤지는 대강 짐작이 갔다. 여자는 인사치레를 하러 온 것처럼 드문드문 묻은 빗방울을 털어내고 있었다. 아마 분수대를 보러 왔다가 갑작스러운 비에 피할 곳을 찾다가 볼프강이 있는 천막으로 들어온 것이 분명했다.
 
 여자가 볼프강은 인식한 것은 볼프강이 여자를 인식한 것보다 한참 뒤의 일이었다. 여자는 볼프강을 보자마자 소스라치게 놀라며 – 너무 깜짝 놀라서 가볍게 뜀박질을 해도 되었을 – 움찔거렸다. 전혀 모르는 사람과의 만남은 이렇게 갑작스럽게 시작한다. 여자가 볼프강에게 어색함을 지우려고 하듯 인사 차 물은 이 말처럼.
 
 “비를 피하고 계신 모양이네요?”
 “네? 아, 네...”
 
 아까와는 달리 볼프강이 알아들을 수 있는 영어였다. 여자의 영어는 아주 유창했다. 마치 영어권의 어느 나라에 오랫동안 살았던 것처럼 말이다. 볼프강은 여자의 질문에 대한 대답에 무심히 비를 내려주는 하늘에게 투덜거리듯 각주를 덧붙였다.
 
 “분수대를 보러 왔는데, 비가 오고 말아서.”
 “분수대를 보러 오셨다고요?”
 
 볼프강의 이런 소신 있는 발언이 여자에게는 제법 놀란 눈치인 모양이었다. 볼프강은 왜 저렇게 놀라지? 라는 당혹감이 안 들 수가 없었다. 볼프강이 궁시렁거리며 여자의 말을 긍정했다.
 
 “아, 네...”
 “보통 이 분수대를 천생연분의 전설을 믿고 찾아오는 이가 대부분입니다. 허나 분수대를 보러 오셨다니...처음 겪는 일입니다.”
 “이 분수대에 대해 잘 아시는 모양이네요.”
 “제가 이래 뵈도 OO대학에 재학 중인 학생이거든요. 가까워서 가끔씩 산보 삼아 여기까지 걸어오곤 합니다.”
 
 OO대학은 이 도시에 있는 어느 유명한 대학교 이름이었다. 여자의 말마따나 분수대와 가깝기는 했다. 그 말은 여자는 이 도시에서 오랫동안 살아왔고, 볼프강보다 이 분수대를 많이 보아왔다는 걸 의미했다. 어쩌면 이 분수대가 감싸고 살았던 공기조차도.
 
 볼프강이 물었다.
 
 “그럼 순수하게 답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네? 무엇을?”
 “당신이 생각하기에 이 분수대에 얽힌 전설은 사실인거 같나요?”
 “...”
 
 여자는 곧장 대답하지 못했다. 어색한 침묵이 계속 된 이유는 여자의 대답 때문에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그 말은 곧장 부정하지는 못하겠군요. 사실 저도 이 분수대를 처음 찾아온 이유는 그 전설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군요.”
 
 하긴, 관심이 안 갈 사람은 없을 것이다. 여자는 말을 이었다.
 
 “물론 찾는 사람들도 있다하니, 아주 거짓인 것은 아니겠지요. 저한테만 일어나지 않은 일일수도 있고요. 처음의 목적은 불순하였지만, 몇 번이나 찾아오다보니 전 어느 덧 순수하게 이 분수대만을 좋아하게 된 거 같더군요.”
 “...”
 “해질녘의 이 분수대에서 바라보는 해넘이는 참으로 아름답거든요. 그래서인지...이렇게 비오는 날이면...”
 
 문득 쓸쓸해 보여요...울고 있는 것도 같고요. 여자는 방금 전 볼프강이 생각했던 것과 똑같은 말을 찬찬히 내뱉었다. 볼프강은 아마 이 점에서부터 여자를 한두 번 더 유심히 보게 되었던 거 같았다.
 
 가지런히 묶은 검은색의 머리칼, 어두운 탓인지 흐릿한 색감을 가진 파란색 눈동자, 초여름에 걸맞게 하늘하늘한 가디건과 그 안에 내비치고 있는 시원한 재질의 여름용 셔츠 등등이 볼프강의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정말...”
 
 볼프강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왜인지는 본인도 알지 못했다. 그냥 평소에는 느껴본 적 없는 ‘무언가’ 가 볼프강의 어깨를 연신 콕콕- 찌르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볼프강과 여자의 대화가 이상하게 끝맺음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둘의 대화는 제법 길게, 그리고 흥미롭게 이어졌다. 점점 잦아드는 소나기 속, 좁다란 천막 밑에서.
 
 “...그거 참 독특한 생각이군요.”
 “그런가요? 제가 타지인이라는 것 때문일까요? 외로움이라는 감정은 이상하게 잘 알아차리는 거 같습니다.”
 “...”
 
 여자의 목소리에서는 이 분수대가 감싸고 있는 쓸쓸함만큼의 어두운 감정이 느껴졌다. 적어도 볼프강에게는 그러했다.
 
 이것이, 볼프강 슈나이더와 파이 윈체스터의 역사적인 첫 만남이었다.
 
 
 
 
 
※ 현대물 AU 볼프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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