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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적인 캐릭터 해석이 있습니다
‘클로저라는 건, 이럴 때 여간 귀찮단 말이야...’
볼프강은 아이 패드로 근 한 달 간 있을 일정표를 보고서 한숨을 쉬었다. 앞으로의 한 달, 스케줄이 꽉꽉 차 있었다. 딱 하루를 빼고.
발단은 아주 사소했다. 며칠 전의 이야기. 소파에 앉아 루나가 사온 아이스크림을 먹던 파이가 자신의 뒤에 있던 볼프강을 바라보며 되물었다.
-1주년이요?
-곧 우리가 사귀기 시작한 지 1년이 되어가잖아.
아, 벌써 그렇게 되었군요. 파이의 담담한 반응에 볼프강은 살짝 서운했다. 일일이 날짜 체크까지 다 한 자신이 갑자기 좀 유난이었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아이스크림을 물고 잠시 생각하던 파이는 신기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선배랑 1년이란 시간을 같이 보냈다니...
-넌 말을 항상 그렇게 해야겠냐...
-아뇨, 진심으로 기뻐서 하는 말입니다.
스푼을 들고 눈을 반짝이는 파이가 이뻐보이는 건 자신이 콩깍지가 단단히 쓰인 탓이리라. 볼프강은 한숨을 쉬며 삐걱거리는 소파의 등받침 부분에 턱을 괴었다. 작은 행동 하나를 했을 뿐인데, 순식간에 파이와 볼프강의 거리가 좁혀졌다.
파이가 물었다.
-그럼 1주년이 언제부터입니까?
-10월 31일. 딱 한 달 남았어.
-어? 잠깐만요, 선배. 저희 그 때 해외 출장이지 않나요?
그런 건 귀신 같이 잘 알았다. <사냥터지기> 팀은 며칠 후부터 두 달간 해외 출장을 가야하던 참이다. 이래서 클로저가 싫었다. 기념일에 작은 이벤트라도 하려고 하면 큰마음을 먹고 그 까다로운 스케줄 조정까지 다 해야 하니 말이다.
-어...앨리스와 재리에게 부탁해서 그 날은 좀 빼달라고 했어. 대신, 다른 날에 열심히 부려먹어 달라고...
파이가 놀란 듯 두 눈을 깜빡였다.
-...선배가 그런 결심을 하시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나만 그러는 거 아니야. 너도 같이 포함이야.
그 정도는 괜찮습니다! 파이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 모습이 마냥 대견해서 볼프강은 파이의 머리를 툭툭- 가볍게 쓰다듬어주었다. 볼프강이 자신의 머리를 헝클이는 걸 가만히 지켜보던 파이가 이건 모른다는 듯이 볼프강에게 물었다.
-그런데 10월 31일이면 저희는 어느 나라에 있습니까?
-아, 그게...
휠 오브 포츈을 타고 며칠 간격으로 이 나라 저 나라를 다니는 거니 적어도 그 날 하루에 어디에 있는지 정도는 알아야 했다. 그래야 그 시간대에 무엇을 하고 놀지 미리 짜맞춰볼 수 있었으니까. 볼프강은 그 말에 잠깐 기억을 더듬었다.
어느 나라였더라. 꽤 익숙했던 거 같은데...
* * *
‘신서울...’
하여간 이상하리만큼 인연은 많은 도시였다. 그리고 파이가 가고 싶다고 열심히 어필한 대공원도 전에는 싸우러 갔던 거 같았다. 더스트의 열풍 때문에 시설이 많이 망가졌다고 얼핏 들은 기억이 있었는데, 그새 다 고친 걸까.
꼭 대공원을 가고 싶다고 하니, 볼프강은 할 수 없이 파이의 의견을 따랐다. 그러고 보니 대공원에 어떤 놀이 기구가 있었더라. 검색을 한창 열심히 하는 와중에 누군가가 뒤에서 불쑥 나타났다. 루나(루나 뒤에서 열심히 숨으려고 노력하는 커다란 멍멍이는 신경 쓰지 말도록 하자.)였다.
“선생님, 내일 파이 선생님하고만 따로 어디 가신다면서요? 앨리스한테 들었어요.”
앨리스는 하여간 아이들 앞에서는 한없이 약해졌다. 물론 볼프강 본인이 할 잔소리는 아니었다. 볼프강은 내심 헛기침을 했다.
“말을 꼭 그렇게 해야겠니...데이트다, 데이트!”
“데이트!?”
루나보다 체구가 커서 일찌감치 존재를 암시했던 소마가 루나의 등에 불쑥 나타났다. 자기 딴에는 숨어보려고 노력은 한 거 같네만, 볼프강은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소마가 잔뜩 볼을 부풀리며 말했다.
“너무해요, 쌤! 어떻게 둘이서면 놀러 갈 수가 있어요!?”
“잠깐만, 소마. 그러고 보니 곧 파이 선생님과 사귀신 지 1년이 다 되어가죠?”
루나의 적절한 캐치에 소마는 서운하다는 표정은 금세 사라지고 아주 그냥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가히 아수라 백작 같은 메소드 연기에 볼프강은 뜨악했다.
“오호호...그러셨구나...”
“뭐야, 2호, 그 표정은...”
“아이 참, 괜히 눈치 없는 제자가 떼를 썼군요. 그럼 아주 재미있는 시간 보내시기를~”
‘갑자기 신사적으로 구는데?!’
생글생글 웃는 소마의 옆에서 괜히 옆구리를 툭- 치는 루나는, 루나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크흠흠...! 그래요, 소마 말처럼 재밌게 즐기다 오세요.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그렇게 말하니까 왠지 모르게 더 걱정이 돼...!’
볼프강은 난감해졌다. 소마가 반짝반짝이를 뿌리며 볼프강에게 부탁했다.
“볼프 쌤~ 설마 대공원까지 가면서 사랑스러운 제자에게 줄 선물을 잊어버리시지는 않으시겠죠?”
“잊어버릴 거다.”
“쳇...”
* * *
그 날이 다가왔다. 아침 식사를 하러 나온 볼프강은 파이는 벌써 외출을 했다고 했다는 소리를 재리에게서 들었다. 시계를 보니 약속 시간까지는 3시간 정도 남아 있었다. 휠 오브 포츈이 정착해있는 곳에서는 버스 하나만 타면 30분 만에 대공원에 도착하였기에, 교통 편(파이는 아직 도시 문물에 익숙해하지 않아했다) 때문에 부러 일찍 출발한 건 아닐 테고...
오늘 아침 식사는 간단하게 베이컨, 계란 프라이, 토스트 2장이면 될 듯 했다. 아침을 만들며 볼프강은 열심히 생각했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
그러고 보니 며칠 전부터 스마트폰에 익숙하지 않아하던 사람이 쉬는 시간마다 틈틈이 폰을 보고 있던 것이 떠올랐다. 마치 누군가에게 조언을 구하고 있는 것처럼.
‘앨리스는 아닐 테고.’
그 대상이 앨리스였다면 폰으로 자문을 구하는 것보다는 직접 만나는 것이 더 편할 테니까. 그런 거라면 독일 지부에 속한 사람은 아니라는 뜻. 그렇다면 다른 지부?
신서울이라는 말에 묘한 미소를 지었던 파이가 떠올랐다. 그리고 ‘일련의 사건’ 이후로 파이와 부쩍 친해지게 된 신서울 출신 클로저 두 명을 볼프강은 이미 알고 있었다!
볼프강은 마지막 남은 베이컨 한 조각을 마저 먹으며 생각했다. 슬슬 준비해서 나갈 시간이었다. 파이의 몇 몇 행동들에 대해 대충 눈치가 까진 볼프강은 피식 웃었다. 의외로 감정 표현이 솔직하지 못한 부분도 있는 녀석이었다.
‘녀석...생각보다 기대를 많이 한 눈치네.’
그건 볼프강도 마찬가지였다. 자기만 들떠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에 볼프강은 안심했다. 현재 한국의 계절은 늦가을이었다. 살짝 두꺼운 셔츠 위에 얇은 코트를 걸치고 가면 될 거 같았다. 머리는 그냥 풀고 가기로 했다. 그리고 볼프강은 아주 커다란 심호흡 끝에 마지막 작업에 돌입했다.
거울을 보며 단장을 하는 볼프강을 제자 3명은 아주 부담스러울 정도로 빤히 쳐다보았다. 그 시선에 못 견딘 볼프강이 대꾸했다.
“너희 셋...아주 그냥 눈 빠지게 나를 본다?”
“앗, 저희가 그랬나요?”
“볼프 쌤이 엄청 들떠있으니까요!”
“세트는 선생님 녀석이 아까 전의 파이처럼 보여서 본 것뿐이다!”
루나는 당황했고, 소마는 솔직하게 대답했고, 세트는 파이도 비슷하게 들떠있다는 힌트를 주었다. 볼프강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파트너도...들떠 있다...라.”
그랬다. 볼프강과 파이는 실로 오랜만의 데이트, 그것도 1주년이란 타이틀이 붙은 데이트에 매우 들떠 있었다. 그렇게 제자들을 뒤로 하고 나온 볼프강은 마침 가는 길에 만난 재리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럼 다녀올게, 재리.”
“네, 볼프. 조심히 다녀오세요.”
“내가 애도 아니고. 선물 사올게.”
오늘 하루는 힘겨운 시간을 보낼 팀원들에게 볼프강이 해줄 수 있는 최소한의 성의였다. 그러고 보니 소마가 자기 선물도 사오라는 말을 했었지, 아마.
이왕이면 다 사오지, 뭐. 볼프강은 문을 열고 나섰다.
* * *
약속 시간에 제 시간에 도착했다. 마침 주말인지라 대공원 입구는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독일에서는 파이의 외모가 눈에 띄는 편이었는데, 한국에서는 오히려 볼프강 자신이 눈에 더 띄었다. 파이를 찾아 서성거리는데 자신을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선배!”
그와 함께 이쪽으로 투다닥- 뛰어오는 소리도 들렸다. 저 멀리서 발견한 볼프강을 향해 달려오는 소리였다. 자신의 뒤쪽에서 나던 소리였기에 볼프강은 당연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
...압도당했다. 볼프강은 재빨리 고개를 들었다. 자신의 당황하는 얼굴을 파이에게 보여주기 싫은, 무의식적인 습관 같은 거였다.
파이는 볼프강과 비슷한, 가을용 트렌치코트를 입고 나타났다. 하필이면 색상도 비슷하여 얼핏 보면 커플룩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사실 그건 상관없었다. 볼프강이 압도를 당한 건 청명한 신서울의 가을 햇살을 등에 지고 나타난 파이의 모습이었다. 자신의 연인은 언제 봐도, 어떤 모습을 하던 정말 예뻤다. 머리를 풀고 나타난 볼프강과 달리 이쪽은 가지런하게 하나로 묶어 아래쪽으로 흐트러트린 모습이었다.
볼프강의 앞에 나타난 파이가 가쁜 숨을 고르는 동안, 볼프강은 겨우겨우 물었다. 자신의 얼굴이 선명하게 익혀질 것만 같았다.
“너, 너...그 옷은...”
“아, 바이올렛 양에게 빌렸습니다. 제가 신서울 날씨에 알맞은 옷은 요원복 이외에는 별로 없어서...하지만 명색이 데이트라는데 요원복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 두 사람에게 SOS를 요청했죠. 이 뒷말은 볼프강에 전혀 들리지 아니했다.
아, 무슨 말을 해주지? 너무 예뻐? 아니야. 지금 지구상에서 네가 제일 예쁠 거야? 아니, 아니, 이러면 오히려 장난 칠 줄 알거야...그렇게 고심 끝에 엄선한 볼프강의 칭찬은 참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잘 어울려...”
“넷!? 저, 정말입니까?!”
“어...”
차마 얼굴을 못 보겠어! 멀뚱멀뚱한 볼프강을 위아래로 쓱- 훑어본 파이가 말했다.
“선배도 저랑 옷차림이 비슷하네요.”
“응?! 어? 어어...역시 가을에는 트렌치코트! 랄까.”
“마치 그거 같네요. 커, 커플룩?”
“...”
“...”
화끈— 두 사람의 얼굴은 순식간에 붉어졌다. 이 나이가 되도록 이런 거 하나하나에 설레다니...새삼 놀랍기도 하다. 볼프강은 먼저 용기를 내어 아무렇지도 않은 척(이럴 때에 유독 당황해하는 건 아무래도 파이가 빈도수가 훨씬 높았다. 그렇다고 볼프강 또한 당황하지 않은 적은 없었다.), 대공원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 그럼 이제 들어갈까?”
“네, 넷...!”
“그렇게 긴장하지 말고...”
우리가 무슨 훈련하러 가는 것도 아니잖아. 볼프강은 부드럽게 파이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대공원 입구로 들어가는 길은 짧았다. 하지만 파이에게는 영원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선배의 손은 크고 부드럽고...’
따뜻하기까지 해...이런 생각에 잠겨있는데 볼프강이 대뜸 물었다.
“그런데 왜 하필 대공원이야?”
“네?”
“내가 보기에는 놀이 기구 같은 거 생소하다고 할 거 같았거든. 그런데 네 입에서 먼저 대공원을 가자는 말이 나올 줄 몰랐어.”
“아...”
이런 부분은 항상 날카롭단 말입니다, 선배. 칭찬에 가까운 말을 중얼거린 파이는 살짝 귀띔했다.
“사실은 조언 좀 구했습니다.”
“바이올렛 대원과...또 한 사람은 서유리 요원이지?”
“어, 어떻게 아셨습니까?”
“네 얼굴에 다 쓰여 있어. 그것도 유성 펜으로.”
볼프강의 장난 어린 농에 파이는 얼굴을 이리저리 만졌다. 볼프강은 그런 거 안 쓰여 있으니 걱정하지 마, 라며 안심시켰다.
“그렇다면 솔직히 말하지요. 서유리 양이 얼마 전에 대공원에 놀러갔었다는 말(in 소드&걸스 전용 톡방)을 했습니다. 매우 즐거워 보이기에 저도 무심코...”
“나쁜 짓 한 거 아니야. 그냥 궁금했을 뿐이야.”
“그리고 궁금하기도 했습니다. 대공원은 어떤 곳인지...”
많은 도시를 다녔지만, 이런 놀이 시설에서 하루를 보낼 만한 여유는 가져본 적이 없으니까요.
게다가 슈에가 마을을 떠나면 가고 싶어 했던 곳 중 하나. 그 당시의 슈에의 꿈은 파이의 꿈이나 마찬가지였기에 파이의 꿈도 대공원을 가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결정되었다.
이 비밀은 아직까지는 말하지 않기로 했다. 볼프강에게 괜한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아서. 그리고 지금 당장은 파이 스스로도 오늘 하루는 재밌게 즐기고 싶었다.
“그런데 너 오늘 아주 놀려고 왔구나.”
볼프강의 이 말의 의미는 파이의 옷차림이 코트를 제외하면 엄청 활동적인 옷이었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이 볼프강은 파이가 항상 예뻐 보였다.) 파이가 아주 잘 알아차렸다는 듯 엄지를 세웠다.
“물론입니다!”
“하긴, 놀라고 만든 놀이 기구 잔뜩 많은 곳인데, 많이 안 타는 것도 이상하지.”
“선배! 오늘 여기에 있는 모든 놀이 기구 다 타는 겁니다!”
“그러려면 서둘러야 할 걸? 몇몇은 줄이 길어서...”
“자자, 갑시다, 선배!”
파이는 제일 가까운 롤러코스터 쪽으로 발걸음을 틀었다. 볼프강은 잠시 망설였다.
쟤 멀미도 잘 하는 애인데, 괜찮을까? 라고.
* * *
결국 멀미를 거하게 한 파이는 벤치에 앉아 속을 삭히고 있었다. 무턱대고 줄을 선 것이 잘못이었다. 하필이면 대공원이 개장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도 생각보다 없어서 최단 코스로 롤러코스터를 가장 먼저 탄 손님이 되었다. 롤러코스터 좌석에 앉아 안전 바를 잡고서 출발 직전, 이게 무슨 놀이 기구이다, 라는 설명을 듣자 파이가 경악했다.
-선배! 저 이거 타도 괜찮습니까!?
-...
아님 말구.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멍하니 있는데 뺨에 차가운 캔이 닿았다. 볼프강이 사온 이온 음료였다.
“자.”
“감사합니다, 선배...”
“괜찮아. 어땠어? 첫 롤러코스터 소감은?”
“죽는 줄 알았습니다.”
도대체 어떤 자가 저 놀이 기구를 만든 것입니까아...거의 죽어가는 파이의 옆에 앉아 캔 커피를 멋쩍게 마셨다. 볼프강은 사과했다.
“미안, 빨리 말했어야 했는데.”
“괜찮습니다, 선배. 따지고 보면 제 인과응보인 셈이죠...”
“그렇게 거창한 수식어는 필요 없잖냐...처음이라고 했잖아. 처음이니 모든 지 다 신기할거야.”
볼프강은 말은 툭툭- 내뱉는 거 같았지만, 속은 깊은 사람이었다. 파이가 볼프강을 좋아하는 점 중 하나였다. 애꿎은 이음 음료 캔만 톡- 톡- 손가락으로 치자니 갑자기 궁금해졌다.
“그렇다면 하나만 물어보겠습니다. 선배는 언제 처음 대공원에 오셨나요?”
“기억은 안 나지만...아주 어렸을 때였나.”
물론 신서울에 있는 대공원이 아닌, 독일에 있는 테마 파크였지만. 그 때 불꽃놀이도 보고, 회전 목마 같은 것도 타고, 또...
“...”
“...?”
오소소- 돋는 소름에 볼프강은 생각을 멈추었다.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추억까지 같이 떠오를 거 같았다. 캔을 찌부러트리는 볼프강을 보고 파이가 갸웃거렸다.
“선배...?”
“아,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평범했지.”
“선배한테는 평범한 것이었군요. 하지만 저에게는 일종의 ‘환상’ 이었습니다.”
그 환상 속에 드디어 발을 하나 내민 거 같습니다. 파이의 표정은 아련했다. 시선은 볼프강이 볼 수 없는 곳을 보고 있는 거 같았다.
파이에게는 이럴 때가 가끔씩 있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볼프강은 파이의 손을 항상 잡았다. 파이가 그 너머로 사라질 것만 같아서.
“선배?”
“...”
“걱정 마십시오. 선배에게 아무 말 없이 어디론가 가버리는 무례한 사람은 아니니까.”
“그래도...”
걱정은 돼. 볼프강은 이런 불안감을 파이 또한 많은 시간을 같이 지내면서 알게 되었다. 그럴 때마다 파이가 하는 건 볼프강의 불안감을 덜어주는 것. 파이는 참 친절했다. 그리고 볼프강이 파이에게서 좋아하는 점 중 하나였다.
파이의 손을 잡은 볼프강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걱정 정도는 할 수 있잖아...”
“그렇지요. 하지만 선배는 가끔씩 너무 섬세합니다.”
“언제는 그런 내가 좋다더니...”
“지금도 좋아합니다.”
하아...볼프강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말대꾸를 잘 하는 걸 보니 멀미에게서는 해방이 된 듯 했다. 우중충한 화제를 바꾸고자 볼프강은 일부러 쾌활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다음에는 뭘 탈까?”
“저거 어떻습니까?”
파이는 또 제일 가까운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리고 볼프강은 그곳 간판에 쓰여 있는 ‘Ghost house’ 라는 글자를 보고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 * *
“선배...괜찮습니까?”
“괜...찮아.”
아니, 사실은 안 괜찮아.
가던 길을 멈춘 볼프강은 도저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파이 때문이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가야 하는 길 옆쪽에 전시된 괴기스러운 장식과 유령 분장을 한 알바생들 때문이었다.
볼프강에게도 숨기고 싶은 비밀은 몇 개쯤 있었다. 그 중 하나가 볼프강이 유령을 무서워한다는 것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놀이 공원에 있는 귀신의 집에서 나오는 유령을 제일 싫어했다. 어렸을 때 처음 간 놀이 공원에서 호되게 당한 탓이었다. 그것 때문에 아까 전의 파이의 질문에 어렸을 때의 놀이 공원에서의 아련한 추억을 의도적으로 잘랐다.
흉악하게 생긴 차원종들도 많이 상대했고, 심지어 그 중에는 유령의 형상을 한 차원종도 있었건만! 외형과 유령의 집이라는 특수한 환경까지 겹치면 볼프강은 그만 얼어붙고 말았다. 뇌리 속은 온통 뒤죽박죽이었다. 그냥 거절해도 되었는데 괜히 이번 기회에 이겨보겠다는 호승심이 자기 안에 생기게 되었는지에 대한 간단한 고찰, 파이가 자신을 지금 어떻게 내려다보고 있을지에 대한 걱정 등등.
그런데 고개를 숙인 볼프강의 시선에 파이의 손이 보였다. 손을 내민 파이가 말했다.
“손잡으세요, 선배.”
“...”
놀린다던지 뭐 그런 건 하지 않을 셈인가? 이런 볼프강의 기류를 읽었는지 파이가 너털스럽게 웃었다.
“무언가를 무서워한다는 걸로 놀릴 소인배는 아닙니다.”
“...”
“누구나 무서워하는 건 있죠. 어차피 선배였어도 저와 똑같이 행동했을 거 아닙니까?”
“...”
참 올곧다. 이것도 아마 볼프강이 파이를 좋아하는 부분 중 하나였다.
결국 파이의 손을 잡고 귀신의 집을 빠져나온 볼프강은 식은땀을 훔쳤다. 파이에게 감사의 말을 올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고마워, 파트너. 덕분에 살았어.”
“오히려 제가 죄송하네요. 괜히 제가 선배를 억지로 끌고 간 거 같으니...”
“아니야. 들어간 건 내 의지도 어느 정도 있으니 그렇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어느 정도 냉정을 찾은 볼프강을 보며 파이는 손을 괜히 꼼지락 꼼지락거렸다. 볼프강의 손은 언제 잡아도 감촉이 좋았다. 크고, 따뜻하고, 부드럽고...마치 볼프강 같았다.
‘...그렇다고는 절대 말 못해!’
...이 부끄러운 건 볼프강에게 철저히 감춰야할지도. 파이 또한 숨기고 싶은 비밀이 많았다.
초반이 조금 고비였을 뿐, 볼프강과 파이는 해가 질 때까지 대공원에서 재밌게 놀았다. 놀이 기구를 타는 것도 물론, 중간 중간 간식 타임을 가지는 것도 잊지 않았다. 퍼레이드 도중에 나온 칼춤도 파이는 아주 흥미롭게 보았다.
날이 서늘해지기 시작했다. 이제 가야할 시간이 다가온 걸 의미했다. 1주년이라는 타이틀이 붙은 거치고는 꽤나 소박하게, 아무 생각 없이 신나게 놀았던 거 같은데 오히려 그게 좋았다. 파이는 여상히 가벼운 발걸음이었다.
“이야, 오늘 참 재밌었습니다, 선배!”
“이대로 해가 안 지면 좋겠다. 내일부터는 다시 일 나가야하잖아.”
“그 점은 저도 조금은 동의하겠습니다, 선배.”
“...”
“선배?”
“...파이 윈체스터!”
뒤쳐져서 가던 볼프강은 몇 번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다가, 끝내 파이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앞서가던 파이가 의아한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볼프강은 이상하게 긴 상자 하나를 파이에게 건넸다. 쑥스러운 듯 뺨까지 내심 긁적이고 있었다.
“그래도 나름 1주년이니 이대로 넘어가면 좀 그러니까, 여기...”
“이건...?”
“딱 봐도 모르겠나? 선물이잖아.”
그건 저도 압니다만...선물 포장지는 몇 번을 만졌는지 특정 부분은 너덜너덜해져있었다. 아마 언제 건네줄지 많이 망설였으리라. 파이는 호기롭게 포장을 뜯었다. 상자 안에서 나온 건 눈꽃 모양의 은색 목걸이였다.
“목걸이...?”
“예전에 우연히 지나가다가 본 거야. 잘...어울리겠거니 싶어서...딱히 커다란 의미는 없고...”
“...!”
파이는 눈썰미가 좋은 편이었다. 이건 볼프강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름 철저하게 숨기려 고는 했으나, 파이는 볼프강의 목에 걸은 목걸이의 줄이 미묘하게 바뀌어 있다는 걸 알아챘다. 잠시 실례, 라면서 파이는 볼프강의 옷 속에 감춘 목걸이를 꺼냈다. 항상 눈에 익은 네임텍 모양이 아닌, 눈꽃 모양이었다.
파이가 지금 들고 있는 목걸이와 똑같은 목걸이였다.
“...”
“...”
“커플 목걸이입니까?”
“반지는...아직 먼 거 같아서...”
반지는 왜 아직 멀다고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파이는 기뻤다. 눈꽃 모양이라니...파이는 즉시 목걸이를 목에 착용하려고 했으나...처음 착용하는 것이라 영 익숙하지 못했다. 할 수 없이 볼프강에게 부탁했다.
“저, 선배...죄송하지만 목걸이 좀 걸어주시겠습니까?”
“응? 어...”
조심스레 걸어준 목걸이는 파이와 잘 어울렸다. 파이 또한 무척 기쁜 듯 했다. 몇 번이나 목걸이에 달린 장신구를 매만지는 폼에서 확연히 묻어나왔다.
“선배, 너무 예쁩니다.”
“마음에 든다 해서 다행이다.”
“그럼 다음에는 반지입니까?”
“반지는...아직 좀...걸릴지도.”
뭐라고 중얼거리는 볼프강을 향해 파이는 환하게 웃었다. 씩씩한 대답도 잊지 않았다.
“네! 기다릴게요!”
기다려준단다, 이 사람은. 볼프강은 파이를 힘껏 껴안았다. 지금 자신의 품안에 있는 이 사람이 너무나도 좋고, 사랑스럽기까지 해서.
P.S. 대공원에서 볼프강과 파이가 사온 열쇠고리 리스트
강아지 – 소마
고양이 – 루나
호랑이 – 세트
올빼미 – 앨리스, 재리
토끼 - 파이
나무늘보 – 볼프강(??? : 어이, 내가 왜 나무늘보야? 뭐? 게으름 피우는 게 똑같다고? 이봐, 너무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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